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 벽화에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초상화를 삽입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왼쪽 무릎 근처에 자리 잡은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순교한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축 늘어진 자신의 인피를 들고 있다. 다름 아닌 이 인피의 머리 부분에 고뇌에 찬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들을 본떠 그린 그 수많은 근육질의 아름다운 몸들은 다 놔두고 축 늘어진 빈 껍데기를 자화상으로 택한 이유는 아마도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작가의 진정한 번뇌를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반면 라파엘로가 바티칸에서 같은 시기에 그린 벽화 ‘아테네 학당’에서는 제일 오른쪽에서 살며시 고개를 돌려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라파엘로 자신의 초상화가 보인다. 미켈란젤로와는 대조적인 자신만만한 젊음의 초상화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그리고 건축가 브라만테 등 당시의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는 당시 26세였다.
서양 미술사에서 아티스트의 자화상은 창조적 행위의 근본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술 장르다. 나는 왜 우리나라 전통 미술사에서 겨우 몇 점밖에 찾아볼 수 없는 자화상을 렘브란트는 80점, 그리고 반 고흐는 36점이나 남겼을까 궁금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서양 역사상 최초의 자화상은 고대 그리스 BC 6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사진). 스미크로스라는 도기 화가가 서명한 이 작품은 귀족들이 흔히 행하는 심포지온 술 파티를 그리고 있는데, 그중에 머리를 뒤로 젖히며 피리 음악을 운치 있게 감상하는 인물 위에 ‘스미크로스’라고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공인 출신인 아티스트가 귀족적인 레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대담한 작위(作爲)다. 사회적으로는 무명의 고려청자 공인들과 비슷한 지위를 누렸을 이들의 자부심은 우리가 본받을 점이 많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