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더중플-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
해외 공작원은 백색(OC, official cover)과 흑색(NOC, non-official cover)으로 나눕니다. 백색(화이트, white)은 공작원 신분을 감춘 채 영사·무관·참사관 등 외교관 자격으로 자국 공관에 파견돼 기밀 탐지 등에 투입됩니다. 흑색(블랙, black)은 사업가·여행객 등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잠입해 첩보 수집 외에도 암살·파괴·여론조작 등 불법적 비밀 임무를 전담한다. 남파간첩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정규필 전 정보사 대령은 공작장교였습니다. 남북 스파이전쟁의 최일선 중국에서 대북공작원으로 장기간 활약했습니다. 육사와 정보사 HID(북파공작 부대)를 거친 그는 흑색과 백색을 모두 경험한 엘리트 공작원이었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30)입니다. 탐사팀은 ‘제1부-공화국 영웅 김동식의 인생유전’에 이어 ‘제2부-대북공작원 정규필 전 정보사 대령의 증언’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해 대북공작원의 세계를 들여다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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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정규필의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2024년 5월 17일 금요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서초구 대법원 1호 법정. 정규필(59) 전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소속 예비역 대령에게 유죄가 확정됐다. 군사기밀보호법 위반(군사기밀 점유 및 탐지·수집) 혐의다.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명령 160시간을 선고한 항소심이 그대로 유지됐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잃었다. “대통령 사면을 기대해 보자”는 친구의 위로는 공허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법정에 서는 비운의 군인으로 추락했나. 그의 시련은 2019년 3월 31일 대령 예편한 직후 시작됐다. 영문도 모른 채 집에서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당했다. 정규필이 적국에 군사기밀을 팔아먹은 ‘이중간첩’일 수 있다는 반역적 혐의 때문이었다. 다행히 ‘군사기밀 누설’ 의혹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됐다. 이중간첩의 누명은 벗었다. 그러나 압수수색된 그의 개인 컴퓨터 안에 남아 있던 26건의 2, 3급 군사기밀이 문제가 됐다.
정규필은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북파 임무 부대) 훈련과 대북공작원 경력을 거친 육사 출신의 최정예 공작장교였다. 해외 첩보와 기밀 수집을 임무로 하는 정보사에 소속된 공적 존재인 동시에 비밀 요원이었다. 경북 영일 출신으로 대구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42기에 입학(82년)했다. “정보의 영어 단어 ‘intelligence’가 멋있어” 정보 병과를 자원했다.
인생의 변곡점은 91년 9월 찾아왔다. 정보사 HID에 배치됐다. 무장 공작원을 훈련하고 북파를 담당하던 특수 부대다. 그는 팀원 9~13명의 팀장을 맡았다.
2년간의 HID 팀장을 마치고 정보사 예하 서울 ‘남산부대’로 옮겼다. 92년 8월 한·중 수교 이듬해였다. 당시 중국은 남북의 정보와 사람이 오가며 숨 가쁜 첩보전을 펼치는 격전장으로 떠올랐다. 공작장교 선배들이 중국을 오가기 시작했다. 정규필도 통역으로 중국을 따라다니면서 공작 활동을 위한 ‘여건 탐색’을 했다. 대북공작원으로 성장하려면 중국 대륙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첫 공작 임무, 황장엽 망명 사건
정규필은 북한과 인접한 중국 랴오닝성 성도인 선양(瀋陽)을 눈여겨봤다. 당시에 북한 영사관이 있던 선양은 북한의 대남공작 거점이었다. 95년 9월 ‘만철소재 선양지사장’이라는 장돌뱅이 장사꾼으로 위장한 채 선양에 도착, 공작원의 운명에 첫발을 내디뎠다.
공작원 삶에 적응해 가던 97년 초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사건이 터졌다. 황장엽은 그해 2월 12일 한국 베이징 총영사관으로 피신한 뒤 망명을 전격적으로 요청했다. 북한은 “남조선의 납치극”이라며 노발대발했다.
황장엽 망명 소식은 선양에도 곧바로 알려졌다. 황장엽 암살조가 급파됐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서로 집을 왕래할 정도로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던 60대 조선족 중국인 사업가가 고민을 조심스레 털어놨다.
선양 북한영사관에 김정일 매제라는 북한 고위 인사가 왔다. 북에서 황장엽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크다고 한다. 내일 그 매제와 한잔하기로 했는데, 무슨 얘기를 해주면 좋을까.
정규필에게 공작원의 본능이 발동했다. HID에서 배운 ‘적기가’ 가사가 날벼락처럼 머리를 번뜩 스쳐갔다.
한번 배신자는 돌아와도 또 배신한다. 황장엽이 암살되든, 자연사하든 북의 소행으로 의심받을 것이 뻔하다. 북한의 체면을 살리는 쪽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겠나.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라는 북한의 적기가가 있다고 들었다. 황장엽에게 배신자, 쓸모없는 쓰레기로 덮어씌우면 좋지 않겠는가.
조선족 지인은 김정일 매제와 밤늦도록 양주를 마시며 정규필의 말을 자신의 조언으로 포장해 전달했다고 한다.
2010년 7월,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대령 정규필은 밀명을 띠고 베이징(北京)에 내렸다. 대북 공작장교로서 세 번째 중국 파견이다. 선양(瀋陽)의 흑색(1995년, 위장 신분)을 거쳐 베이징의 백색(2002년, 한국대사관 무관보좌관) 요원에 이어 한국대사관 육군무관으로 투입됐다.
정규필에게 떨어진 밀명은 남-북 비밀 핫라인을 구축하라는 정권 실세의 지시였다. 이명박(MB) 정부는 1년 전 무산된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을 재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소통 라인이 단절된 상태였다.
반전의 스토리는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정부는 화재 수습을 마치고 남대문 복원을 하려는데 주재료로 쓰일 금강소나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마침 북한이 북한산 금강송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의향을 대북사업자 R(당시 46세)을 통해 임태희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에게 타진했다. MB 정부로서는 남북 교류를 지필 불씨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했다. 북한 금강송의 반입 여부를 논의하던 2009년 8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남북 접촉 물꼬…숭례문 금강송
북한은 조문단을 서울로 보냈다. 조문단의 서울 방문은 경색됐던 남북대화의 물꼬를 텄다. 이 과정에서 그해 7월 노동부 장관에 임명된 임태희의 비선라인이 가동했다. 남북의 화해 무드가 급속도로 무르익었다. 9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에서 북한의 황강댐 방류로 야영객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규필은 베이징 협상팀을 원격에서 지원했다. 북한이 이례적으로 “유감과 조의”를 표명했다.
보수 정권 최초의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이 눈앞에서 잡힐 듯했다. 그런데 옥수수 5만t의 대북 지원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달이 났다. 북한은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옥수수 5만t은 노무현 정부가 약속했던 것인데 MB 정부로 넘겨진 사업이었다.
임태희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정부 내 회의를 통해 옥수수 5만t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대북 강경파이던) 통일부가 북한에 ‘(5만t이 아닌) 1만t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 대북 강경파는 옥수수를 주도권의 지렛대로 삼으려 했다. 북한의 자존심이 구겨졌다. 옥수수 지원은 없던 일이 됐다. 2009년 남북정상회담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명박 정부는 믿을 수 없다’며 북한은 미련을 접었다.
북한 강경파 부상과 천안함 피폭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 피격 사건이 터졌다.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 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 승조원 46명이 전사한 국가 안보 차원의 중대한 사태였다. 남북교류는 중단됐고, 얼어붙었다.
정규필은 흥미로운 증언을 했다. 천안함 사건이 터지기 6개월 전의 일이다. 남북정상회담 얘기가 물밑에서 오가던 시기였다.
정보사 부산부대장이던 정규필은 중국과 북한 접경지역의 정보원으로부터 “북한 대남공작원이 ‘이제 남측을 상대할 방법은 수중 가미카제 수법밖에 없다. 자살로 박아서 격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정보사의 정상 루트로 긴급 첩보보고를 했다. 계통에 없는 해군작전사령부 기무부대장에게 전했고, 이 첩보는 다시 해군작전사령관에게 보고됐다. 작전사령관은 곧바로 헬기를 타고 평택 2함대 사령부로 날아가 명령했다. 해군 작전사 기무부대장(P대령)과 해군작전사령관은 적절한 조처를 한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6개월 후의 천안함 폭침은 막지 못했다.
2011년 7월 23일, 평양에서 특명을 받은 북측 인사 2명이 중국 베이징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주중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정규필에게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냈다. 양측은 베이징 웨스틴호텔에 객실 하나를 접선 장소로 잡고 극비리에 회동했다.
50대 남성은 ‘장군님(김정일)을 지근에서 모시는 참사 허정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를 수행한 40대 후반의 장영철은 ‘허정수 참사를 돕는 실장’이라고 했다.
북측과 접촉 직후, 정규필은 임태희와 류우익(이하 존칭 생략)에게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급거 귀국했다. 임·류 두 사람에게 각자의 명함에 직접 서명해 달라고 부탁, 흔쾌히 받아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정규필은 자신을 기다리던 북측 인사들에게 서명된 명함을 전달했다.
북측도 신의와 성실의 차원에서 얼굴을 노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규필과 북측 인사들이 함께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도 좋다는 동의를 끌어냈다. 한국 정보기관이 사진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신원과 직위를 조회해도 자신있다는 뜻이었다.
임태희·류우익 사인한 명함
북측 인사들이 평양으로 돌아간 지 닷새쯤 지난 8월 초, 북한은 중간연락책 김 선생을 통해 정규필의 평양 방문을 초청했다. 정규필이 방북하는지를 보고 남측의 진정성을 재보려는 노림수가 깔렸다.
정규필 방북이 성사된다면 현역 군인 신분으로서는 남북 교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정규필은 임태희와 류우익에게 보고한 뒤 VIP(이명박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렸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보류” 지시가 떨어졌다. 하릴없이 일단 베이징에 빈손으로 복귀했다.
한 달 반쯤 지나 북측은 정규필에게 두 번째로 방북을 제안했다. 그즈음 전 주중대사 류우익이 통일부 장관에 취임했다. 1, 2차 방문 초청이 무산되자 북한은 세 번째로 방북을 종용했다. 더는 둘러댈 핑계가 궁색했다. 북한이 이명박(MB) 정부에게서 대화 의지가 없다고 판단할 경우, 소통 창구에 빗장을 지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배제할 수 없었다. 정규필이 먼저 방북해 사전 정지작업을 마치고 2단계로 류우익 또는 임태희가 특사로 파견되는 구상이 논의됐다.
물론 최종 목적지는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두 사람은 정규필의 방북을 승인하고 준비를 지시했다. 정규필은 와이프에게 “평양에 다녀와야 한다. 위험할 수 있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대기하라”는 명령이 또 내려왔다. 번복의 배경을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북측에선 “왜 안 오냐” “배짱이 없냐”고 불만을 털어놨다.
김정일 사망…35만원 부조
반전의 카드가 시급했다. 11월 1일 류우익 통일부 장관에게서 밀지(密旨)가 왔다. ‘남북 간 고위통일당국자 회담’을 주선하라는 지시를 꺼냈다. 북한의 대남 기구인 통일전선부(통전부) 측에 연락해 남북 고위급회담을 제안했다. 북한이 수용해 베이징에서 긴급 회담이 성사됐다. 우리 측 대표는 문무홍 전 개성공단이사장, 정규필 등 3명이었다. 북한에선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 김만수 북경대사관 참사 등 3명이 나왔다.
양측 실무자들은 면담과 신임장 확인을 마치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천안함 사과 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남측은 천안함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은 ‘불가’하다는 고집을 굳히지 않았다. 양측 대표의 만남은 무산됐고, 회담은 결렬됐다. 그해 11월 말 임태희가 대통령실장에서 물러났다. 추진 동력이 떨어졌다.
12월 17일에는 김정일이 사망했다. 중국 돈 2000위안, 한화 35만원 정도를 부조금으로 냈다. “원수끼리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문상한다. 당신들은 (김정일 조문과 관련해) 아는 척도 안 했다”는 북한의 섭섭함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더중앙플러스 - 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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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대북공작원 정규필 전 정보사 대령의 증언
① “황장엽 망명, 내가 수습했다”…법정에 선 비운의 공작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861
② 31쪽 공소장 다 뒤져봤다…수미테리 홀린 유혹 실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5479
③ “금창리 핵시설” 한미 낚였다…北 ‘비닐봉투 역공작’ 전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7190
④ “야동 5만달러어치 구해달라” 북한군 중좌의 황당한 연락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8821
⑤ “북한 수중 자살특공대 준비” 첩보 6개월뒤, 천안함 터졌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0366
⑥ 임태희·류우익 사인한 명함…평양행 티켓, 3번 무산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1794
⑦ 정규필 “난 이중간첩 아니다”…37년 공작원의 5가지 반박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5239
〈제1부〉 ‘공화국영웅’ 남파간첩 김동식의 인생유전
① “동무는 남조선 혁명하시오”...18세 김동식, 인간병기 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6198
② “혁명적 자폭” 세뇌된 김동식…폭파범 김현희도 동문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7583
③ 9년 갇힌 채 적구화·밀봉 훈련…평양 간첩, 서울 사람이 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8992
④ 74세 할머니 간첩, 이선실…포섭 타깃은 김부겸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0769
⑤ “밤 12시 평양방송 들으시오” 김부겸 허탕뒤 포섭한 ‘H선생’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2409
⑥ 브래지어 싸들고 잠수정 탔다…‘할머니 간첩’ 월북 때 생긴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108
⑦ 공작조 10팀이 남한 누볐다…품성까지 적힌 ‘포섭 리스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606
⑧ 北도 포섭 1순위는 SKY 출신…간첩 만난 미래 장관·의원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27
⑨ 대선 2년 전 “김대중 될 거다”…北, 고은 포섭 지령 내린 까닭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8837
⑩ 경찰관 2명 쏜 남파간첩, 29년 만에 용서 구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0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