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타협 없이 대립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은 좌우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하던 해방정국 풍경과 닮았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5)입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인물 중심으로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를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봅니다. 중앙일보 독자들을 위해 제 6부 ‘해방정국의 3대 비극 - 여수·순천 사건 하편’을 무료로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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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부〉해방정국의 3대 비극
〈①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박헌영 前비서가 고문했다, 김구 세력 거세하려한 그들 〈上〉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2387
엘베에 ‘4층’ 안쓰는 이유, 여순 사건이 부른 공포다? 〈下〉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3416
〈② 1948년 제주 4·3사건〉
제주 4·3사건 좌우 깊은 은원…학자 소신, 참으로 무력하다〈上〉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0396
“전원 총살하라” 성산포 문서…“부당, 불이행” 문형순이었다〈下〉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1801
〈③ 1946년 대구 사건〉
청군·홍군 왜 청군·백군 됐나…초등운동회 바꾼 웃픈 사연〈上〉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7163
혁명도 빨갱이 폭동도 아니다, 좌우가 왜곡한 대구사건 진실 〈下〉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8831
〈제6부〉 해방정국의 3대 비극 - 1948년 여수·순천 사건(하)
」여수·순천 초토화 ‘4F 작전’
군사고문단이 진압사령관 원용덕(元容德)에게 넘겨준 작전은 ‘4F 작전’으로서, ‘찾아서, 묶어둔 뒤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뜻이었다(『하우스만 증언』, 184쪽).
‘4F 작전’의 하수인은 세칭 백두산 호랑이인 김종원이었다. 전직 관동군 헌병 출신이었던 그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날씨와 농사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종원은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상태에서 총살하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梧洞島) 앞바다로 밀어 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니뽄도(日本刀)로 직접 피의자의 목을 베고 한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 169, 213, 331쪽).
무슨 연유로 김종원은 그리 포악하게 권력을 휘둘렀고, 왜 여순사건에서는 그리 보복이 심했을까? 경북 경산의 빈농의 아들인 김종원은 신분 상승의 욕망이 강렬했다. 일제시대에는 지원병으로 파푸아-뉴기니에서 절륜한 체력으로 용맹을 떨쳤고, 해방과 더불어 국방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1기생으로 졸업한 군부의 선두주자였다. 여순사건 당시 이 지역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Snake Kim’(김창룡)과 함께 ‘Tiger Kim’이라는 별명으로 잔혹의 쌍벽을 이루었다. 한국전쟁 때는 경남지구계엄사령관으로 한국은행의 금괴를 이송하는 책임자가 될 만큼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이 대통령은 그를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격찬했지만 용맹함과 무모함이 구분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장면(張勉) 부통령 암살 미수 사건(1956) 이후 권력에서 밀려나 1964년에 지병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초토화 작전으로 여수·순천 반란은 종식되었지만, 여수의 함락은 반란의 종식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무서운 보복과 살육이 전개되었다. 물 빠진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으며, 정체불명의 편지를 배달했다는 이유로 배달부가 처형되었다. 목포·해남·완도·진도에서는 양민들이 바다에 실려 가 돌에 매달린 채 수장되었다(『여순 사건 실태조사보고서』(1), 16, 288, 229, 258쪽).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의 한 회원은 “호박잎 하나 건네준 죄”로 잡혀갔다(『順天市史』, 1997, 818쪽). 종산(鍾山)국민학교에서는 125명을 처형해 묻어버렸다. 이 학교는 지금의 여수중앙초등학교인데 앞서 이발사가 말한 바로 그 학교다. 문중들 사이의 해묵은 감정을 이유로 처형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여자들의 국부를 막대기로 쑤시기도 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 289~323쪽). 내 책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의 미국어판(The Politics of Separ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1943-1953, Edison: Jimmondang, 2008)이 출판될 당시 미국 측 편집자는 이 문장이 너무 야만적이어서 문명국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라는 이유로 표현을 바꿀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나는 “They (policemen) violated women with sticks.”라고 문장을 바꾸었다. 읽는 이의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군번이 ‘260×××’로 시작되는 청년들도 처형되었는데 이는 14연대 병력의 군번이 260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인민위원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처형된 사람도 있지만, 당시에 이념의 확신 때문에 인민위원장을 맡은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구장을 맡는 심정으로 그 직책을 맡았다.
보복은 이듬해에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보복 살인 가운데서도 보도연맹(保導聯盟)에 대한 살육이 가장 처절했다. 보도연맹은 반공 검사 오제도(吳制道)의 제안으로 1949년 4월 21일에 발의되어(동아일보 1949. 4. 23.) 6월 5일에 결성된 것으로서, 초대 간사장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 조사부장이었던 박우천(朴友千)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을 조직하면서 여기에 가입하면 좌익으로서의 전과를 묻지 않고 애국적인 국민으로서 포용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예비 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하기 이전에는 생업에 충실한 양민이 대부분이었다.
‘보도연맹’ 이름에 희생된 사람들
어느 날 나의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구장이 보도연맹에 들라고 하는데 어쩔까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무렵 사람들은 보도연맹이라면 당연히 시국 강연을 하는 보도연맹(報道聯盟, reporting union)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자수한 공산주의자들을 회개하게 만들어 잘 보호하고 인도하는 모임” 곧 보도연맹(保導聯盟)으로 안사람은 거의 없었다. 글줄이나 읽은 사람도 그랬는데, 배우지 못한 농부들이야 오죽했겠는가? 거기에 들어가면 비료 표도 준다고 했다. 아버지는 별 뜻 없이 보도연맹에 들어가셨고, 그날 이후로 사흘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며칠이 지나 밤중에 밖에서 신음이 들려 내다보았더니 마당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놀라 나가 보니 아버지였다.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내가 울며불며 이웃 사람들을 불렀다. 어떤 아주머니는 다야찡이 좋다 하고 누구는 구아노찡이 좋다고 했지만, 그런 약을 어디에서 구하는지도 몰랐다. 다야찡은 전시부상병들의 지혈제였고, 구아노찡은 지사제(止瀉劑)였는데 워낙 위약(僞藥, placebo) 효과가 높아 감기와 골절에도 썼다.
그때 정씨 아저씨가 말했다. 옛날에 저렇게 고문당한 몸에는 오래 썩은 똥물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아저씨와 함께 재래식 변소에 가 똥물을 퍼 용수로 걸러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었다. 며칠이 지나 아버지는 깨어나셨다. 아버지는 그때 얻은 골병으로 평생 오만 삭신이 쑤시는 고통 속에 살다 돌아가셨다. 몸이 괴로울 때면 “그때 문광면 지서 주임 장(張?)씨가 왜 나를 그렇게 팼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지서 주임은 쉬엄쉬엄 사흘 동안 패며 히죽거렸다고 한다.
그때 생각만 하면 목이 메고 앞이 뿌예진다. 국창(國唱) 박동진(朴東鎭) 선생도 묵은 똥물을 마시고 득음(得音)했다는 수기를 남겼다. 그래서 그분의 창을 들을 때면 아버지 생각이 더욱 절절하다. 그때 맺힌 원통함이 이제까지 내가 독하게 살아온 근력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억울한 일 겪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여수·순천 사건을 다루면서 가장 거북스러운 대목이 바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연루설이다. 수사 과정에서 방첩대에 끌려온 많은 장교 가운데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소속의 박정희 중위는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무기징역이라는 기록도 있다. 박정희는 신문 과정에서 이재복(李在福)·이중업(李重業)으로 이어온 한국군 내부의 적색 조직을 백선엽에게 실토했다.
박정희의 진술에 따라 “줄기에 딸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200명의 남로당원이 체포되었다(‘실록 박정희’, 중앙일보 1997. 11. 17.). 이로써 그는 감형을 받아 한국전쟁 직전 석방되어 군대에 복귀했다. 『이한림(李翰林) 회상록』(390쪽), 『장도영(張都暎) 회고록』(신동아 1984년 7월호, 133쪽), 『김정렬(金貞烈) 회고록』(121쪽), 백선엽 회고록 『軍과 나』(347쪽), 『하우스만 증언』(34쪽), 이치업 회고록 『번개 장군』(24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조선일보(1949. 2. 17.)에도 보도된 바 있다. 필자들은 서로 자기가 박정희를 살려주었다는 뜻으로 글을 썼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 2001, 10쪽)에서 박정희가 “공산주의를 찔러보는 유희(flirted with communism)에 빠진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치업은 박정희의 동기인 육사 2기생의 80%가 좌익이었다(95쪽)는 말과 함께 그 당시 군부의 좌경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기록했다.
이 문제는 미국의 정가에도 관심거리였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 9일, 미국 대리대사이며 쿠데타 전문가인 그린(Marshall Green)은 그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고 박정희를 안심시켰다(Kim Hyung-A, 2004, 71, 360쪽). 이 문제는 흔히 오고 가는 이야기인데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언제까지 뒤에서 수군거리다가 말만 더 증폭시킬 일은 아닌 것 같다.
전국서 교원 5000여 명 쫓겨나
당초에 여수·순천 사건은 군부 안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국가 또는 정부의 전복을 도모한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의 남로당 잔여 세력이 남도 끝자락에서 연대 병력으로 ‘공산혁명’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공산화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민중의 참여와 그들에게 엄청난 아픔을 준 데 대하여 중대장 김지회(金智會)나 지창수는 지리산으로 입산한 뒤 이현상(李鉉相)으로부터 “군사적 모험주의”라는 이름으로 심한 질책을 받았다(『順天市史』, 802, 806쪽).
여수·순천 사건 이후로 한국은 엄혹한 우익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로 국군 부대의 단위별 명칭에는 ‘4’자를 넣지 않는 관례가 생겼고, 그런 풍조가 확대되어 엘리베이터에도 4층을 쓰지 않게 되었다. 또 여순 사건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1948년 12월에 공포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이었다. 이 법에 따라서 군부에 광범위한 경찰권이 부여되었다.
안호상(安浩相) 문교부 장관은 취임 뒤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전국 교원에 대한 사상 경향을 조사하여 전체 교원 가운데 10%인 5000여 명을 교직에서 퇴출하기로 했다(연합신문 1949. 1. 23.). 이어서 3월 8일 서울운동장에서 서울 시내 10만 학도들의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을 결성하여 학생 조직을 연대니 대대로 불렀다(서울신문 1949. 3. 9.).
여수·순천에서 5400여 명이 죽었는데(연합신문 1949. 6. 18.) 그 가운데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설령 모두 빨갱이였다 하더라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어차피 겪어야 할 죽음이 일찍 왔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서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 위에 씌워진 너울이 억울하고 정의롭지 않았으며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정당하지 않았다.
원인만 강조하는 것은 결과를 호도하려 함이다. 가해자와 희생자가 우익이었든 좌익이었든 그들에게는 합당한 진혼제가 필요하다. 이 사건은 격동기의 혼란이나 이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민족사의 비극이었으며, 언제인가는 해원(解寃) 해야 할 과제다. 이 사건은 전설도 아니고 구비문학(口碑文學)의 소재도 아닌 엄연한 현실이며, 잊기에는 아직도 그 모습이 내 눈에 선연하다.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목차
① 여인과의 만남은 박복했다…출신 다른 이승만·김구 공통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303
② 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987
③ 좌우 대립의 ‘불편한 진실’…右는 우익, 左는 좌익 죽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731
④ 가슴 따른 자, 머리 못 이긴다…김구와 이승만 ‘정해진 운명’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2924
〈제 2부〉 여운형과 김규식의 만남과 헤어짐
① 임정과 밀정, 그리고 여운형…김구 측근은 권총 빼들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4524
② “대물 여운형” 점찍은 美군정, 병약남 김규식에 눈 돌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6200
③ 미국은 양다리를 못 참았다, 중도파 고집한 여운형 최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7586
④ ‘좌우합작’ 허구의 희생자들…중도파, 비극적 해프닝 맞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8952
〈제 3부〉 송진우와 장덕수,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① 송진우의 ‘찬탁론’ 와전됐다, 기어이 총을 쏜 광기의 시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0770
② 누가 장덕수를 암살했나…이승만·김구 그때 갈라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2422
〈제 4부〉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 평양서 김구 맞이한 첫사랑…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116
② 아버지는 자결, 조부는 친일…北 택한 홍명희 ‘기구한 3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569
③ 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이념 논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15
④ 北이 꾸민 가장 기만적 모임…‘남북협상’ 비극으로 끝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8833
〈제 5부〉박헌영,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① 박헌영, 이 가혹한 호적등본…생모는 첩, 직업 주막업 기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0650
② 남편 동지의 아이 가졌다…박헌영 아내의 ‘접촉사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2281
③ 스탈린은 박헌영 의심했다…모스크바 면접장서 생긴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860
④ '운명의 여인’ 현앨리스 재회…박헌영 죽음의 빌미 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5466
〈제7부〉 김일성 신화의 진실
① 스탈린·김일성 묘한 공통점, 교회 다녔고 이것 겁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4005
②김정일 실수로 동생 죽었다…‘형제살인’ 추궁한 잔인한 父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5212
③ “이승만 항복할 줄 알았다” 서울 점령한 김일성의 착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5821
더중앙플러스에서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연재 중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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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天市史』(순천: 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
『여순 사건 실태조사보고서』(1), 여수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8)
연합신문 1949. 1. 23.; 1949.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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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 역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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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 Weekly Summary
Kim Hyung-A, Korea’s Development under Park Chung Hee(London : Routledge Curzon, 2004)
Oberdorfer, Don, The Two Koreas(Jackson : Basic Books,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