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업무지구로 재탄생할 서울 용산 정비창 앞에는 낡디 낡은 아파트 6동이 있다. 1970년에 지어져 올해로 54살된 중산시범 아파트다. 1971년에 지어진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인근 이촌동 한강맨션 아파트도 정비사업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데, 용산 한강 변 알짜배기 땅에 지어진 이 아파트만 요지부동이다. 96년에 재난위험 D등급 특정관리대상 시설로 지정됐을 정도로 겉과 속이 다 낡았는데도 그렇다.
이 아파트 소유주들에게 땅 소유권이 없다. 서울시가 땅 주인이다. 마냥 낡아가던 중산시범 아파트에 최근 재건축 해법이 생겼다. 서울시가 주민들에게 땅을 팔기로 했다. 잘 추진되면 중산시범은 국내 최초로 시유지를 매입해 재건축하는 아파트가 된다. 서울시는 최근 공유재산심의회를 거쳐 총 4695.5㎡ 부지 가격으로 1091억9705만원을 책정해 용산구에 통보했다. 3.3㎡당 약 7700만원 선이다. 앞서 두 곳의 감정평가기관의 평균 감정평가액(3.3㎡당 7120만원)보다 조금 올랐다. 그래도 인근 재개발 구역의 땅 호가가 3.3㎡당 억대인 것을 고려하면 저렴한 편이다. 주민들은 거주하는 평형에 따라 2억4000만~5억2000만원을 땅값으로 부담해야 한다.
1년 안에 땅 사야, 주민들 “마지막 기회”
다만 조건이 있다. 소유주들이 1년 안에 땅을 사야 한다. 계약금부터 10% 내고, 잔금은 60일 안에 내야 한다. 또 땅을 사는 목적이 재건축용임을 증명하기 위해 땅을 사겠다는 주민 동의율도 동 별 50%, 전체 75%가 돼야 한다. 조합설립인가 조건과 같다. 용산구 관계자는 “내년 6월 초까지 계약하지 않으면 다시 감정평가를 해서 비용 부담을 하며 똑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측은 “땅을 사겠다고 의사를 밝힌 주민이 90%가 넘는다”며 “시일이 촉박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는 주민이 대다수”라고 덧붙였다. 중산시범이 땅 등기를 하면, 그 이후 재건축 과정은 마침내 다른 아파트와 같아진다. 정비구역 지정, 조합설립, 사업시행 및 관리처분인가 등을 거치게 된다.
땅 소유권이 없다 보니 한때 중산시범이 ‘토지임대부 아파트’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억울하다”고 했다. 토지임대부 아파트와 달리 서울시에 임대료를 한번도 낸 적이 없어서다. 아파트 준공 직전인 1970년 4월 마포구 창전동 와우시민아파트가 부실시공으로 붕괴하면서 불똥이 제대로 튀었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관련 담당자가 대거 물갈이되면서 중산시범의 토지소유권 관련 서류도 사라졌다. 결국 그해 6월 말께 건축물만 분양했다. 대신 분양계약서에 ‘소유권자의 매수 요구가 있을 때 공동지분으로 바로 매수할 것’이라는 조항을 넣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땅 등기는 이뤄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서울시를 상대로 토지 점유에 따른 무상 양도소송을 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땅 소유권이 없어 늙어가는 아파트
중산시범은 ‘날림 행정’이 만든 유별난 사례이긴 하지만, 서울 시내에는 땅 소유권이 없어 늙어가는 아파트가 또 있다. 1972년에 지어진 서대문구 미근동 서소문 아파트다. 경찰청 옆 도심 한복판에 있는데 낡디낡았다. 이 아파트는 하천 위에 지어졌다. 하천을 복개해 아파트를 짓다 보니 소유주들이 건물 지상권만 갖고 있다. 아파트 아래로 여전히 물이 흐른다. 하천을 따라 짓다 보니 아파트 모양도 길쭉하다. 건물 길이가 115m에 달한다. 국토교통부는 2021년 이 아파트를 비롯한 주변을 도심 공공복합사업 후보지로 선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