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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 강국인 핀란드의 '사우나 외교'가 주목받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서방 외교관을 감시하려는 시도가 늘어난 가운데, 맨몸으로 즐기기 때문에 도청 염려가 비교적 적은 사우나가 외교 대화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워싱턴 DC에 있는 핀란드 대사관은 정치인·외교관·언론인·공무원·학자 등을 초대해 사우나를 같이 체험하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외교 사우나 협회'로 불리는 이 모임에 참가를 희망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핀란드 주미 대사인 미코 하우탈라는 "반라이거나 때로는 전라일 때 더 깊은 토론이 가능하다"면서 "넥타이를 맨 채 테이블에 앉은 공식 석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전했다.
주미 핀란드 대사관은 한 달에 1회, 참가자 15~20명을 모집한다. 성별에 따라 나뉜 참석자들은 가운과 목욕 제품이 비치된 탈의실로 안내된다. 누드가 권장되지만, 수영복 차림도 허용된다.
냉·온탕을 여러 차례 오간 뒤 참가자들은 옷을 갈아입고 저녁 장소로 이동한다. 호밀빵·연어·미트볼 등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끝에는 '사우나 증서'를 받고 헤어진다. "180℉(82℃)의 열기 속에서 뛰어난 '시수(Sisu, 강인함·용기라는 뜻으로 핀란드인의 국민성을 의미)'를 보여준 사람에게만 이 증서를 드린다"는 글이 적혀 있다.
핀란드 사우나 외교의 배경에는 핀란드인들의 유별난 사우나 사랑이 있다. 인구 550만 명인 핀란드에 사우나가 약 300만 개가 있을 정도로 국민적인 인기가 높다. "자동차보다 사우나가 더 많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핀란드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도 사우나를 필수품처럼 여긴다. 핀란드의 정부 건물과 대부분의 대사관·영사관은 구내에 사우나를 갖추고 있다.
미국·영국·독일·아이슬란드 등 각국 핀란드 대사관 사우나를 체험하는 행사는 장시간의 스탠딩 파티나 격식 차린 행사보다 호평을 받고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BBC는 지난해 런던의 핀란드 대사관에 있는 사우나협회 체험담을 보도하면서 "핀란드 외교의 '비밀 무기'는 사우나"라고 평했다. BBC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사우나만큼 평등한 곳은 없다"면서 "신뢰와 우정을 쌓고 솔직한 토론을 하기 위한 좋은 환경"이라고 전했다. 주영국 유럽연합(EU) 외교관으로 일하는 페데리코 비앙키는 BBC에 "평소 외교에 쓰는 도구인 정장과 휴대전화 없이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이 매우 색달랐고 즐거웠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사우나 외교에 대한 논란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2012년 한 핀란드 공무원이 언론인들에게 남성 전용 사우나에서 브리핑을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와 관련, 매체는 "이젠 (남성들만 사우나에서 별도 브리핑을 받는) 그런 시대는 끝났다"면서 "핀란드 의회에서 여성 비율은 약 50%다"라고 지적했다.
러, 서방 외교관 감시 시도 늘자 사우나 주목
외신들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사우나 외교가 주목 받았다고 분석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핀란드가 75년 만에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지난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했다. 이를 계기로 핀란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우나 외교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텔레그래프는 "나토 동맹국들이 러시아 해커·스파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사우나 외교가 선택됐다"고 평했다. 주독일 핀란드 대사인 카이 자우어는 텔레그래프에 "사우나는 민감한 토론이 가능한 안전한 장소이자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장소"라고 전했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나토 본부는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환영하면서 자체 사우나를 설치했다.
BBC에 따르면 핀란드 지도자들은 사우나 외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역사도 있다. 19세기 핀란드 전 대통령인 우르호 케코넨은 당시 구소련 대통령이던 니키타 흐루쇼프를 사우나에 데려가 핀란드가 서방과 통합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밤새 설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