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점 훔치고 한 점도 안 판 도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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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6호 23면

예술 도둑
마이클 핀클 지음
염지선 옮김
생각의힘

미술품 절도는 힘든 일이다. 우선 도둑은 작품의 가치를 잘 모른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작품은 보안이 엄청나다. 간신히 훔쳤다 해도 팔기 어렵다. 팔아도 손에 쥐는 돈은 소매가의 3%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분야에 뛰어든 도둑들은 평생 몇 점을 훔치는 데 그친다.

그러나 프랑스인 스테판 브라이트비저(1971~)는 체포될 때까지 유럽 박물관을 돌며 유화부터 조각까지 총 300여 점을 훔쳤다. 한 달에 세 번꼴로 7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다. 물품의 총 가치는 대략 20억 달러.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 힘든 대기록이다. 브라이트비저는 훔친 작품을 하나도 팔지 않았다. 오직 자기 방에 놓고 감상했을 뿐이다. 마이클 핀클의 논픽션 『예술 도둑』은 이 기이한 도둑의 일대기이자 그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브라이트비저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다. 부모가 이혼하자 그의 사회 경제적 처지는 급격히 바뀌었다. 작은 집에서 어머니와 살게 된 그는 대학을 한 학기 만에 그만두었다. 이런저런 파트타임 노동도 늘 오래가지 못했다. 좋아한 건 예술뿐이었다. 여자친구가 생겼다. 어머니는 2층 다락방을 아들과 여자친구에 내주고, 일체 거기 올라가는 일 없이 사생활을 존중해 주었다. 어느 날 그는 박물관을 돌아다니다가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좋아하는 물건으로 채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집에 걸려 있었으나 아버지가 가져가 버린 18세기 총이 첫 사냥감이 된다.

프랑수아 부셰의 ‘잠자는 목동’(1750). 브라이트비저의 절도품 중 하나다. [사진 생각의힘]

프랑수아 부셰의 ‘잠자는 목동’(1750). 브라이트비저의 절도품 중 하나다. [사진 생각의힘]

저자는 브라이트비저가 행복했던 어린 시절부터 추억의 물건을 모아 놓았던 파란색 보물상자를 계속 언급한다. 아마 브라이트비저가 한 일은 그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 즉 자기 방이 그 보물상자인 체하는 것이었을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심리학자들은 그의 범죄가 절도 중독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절도 중독은 범행 뒤 수치심과 후회가 따라온다. 반대로 그는 훔쳐온 예술품 앞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가 ‘절도 중독은 아닌’ ‘세상에서 가장 개성적인 예술 애호가’처럼 보이는 것은 책 절반까지만이다. 후반부터 끝없는 도둑질에 질린 독자들은 주인공이 슬슬 알코올 또는 마약 중독자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임계점을 넘었다. 위험을 느껴도 절도 충동을 못 참게 된다. 전에는 훔쳐온 작품마다 파일을 만들고 관리했다. 이제는 방에 아무렇게나 쌓아두는 바람에 밟히고 깨진다. 좋아하는 것만 골라 훔쳤다는 말도 더는 사실이 아니다. 훔칠 수 있으면 닥치는 대로 쓸어오기 때문이다. ‘보물상자’는 발 디딜 틈 없는 쓰레기장이 된다.

저자는 브라이트비저가 어떤 인간이라고 미리 판단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스스로 드러내게끔 두는 느낌이다. 어느 순간 독자는 그의 정체를 알게 되고, 마지막엔 주인공 본인도 깨닫게 된다. 그가 사랑하고 잘하는 것은 박물관에서 그림을 훔치는 것뿐이었다. 인생의 의미가 거기에 있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도둑질의 예술가였다.

『예술 도둑』은 박물관이 근본적으로 보안이 취약한 공간임을 알려준다. 박물관은 금고가 아니며, 소장품을 사람들 코앞에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 지키려면 예산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브라이트비저가 잘 알고 있었듯 박물관은 충격적으로 영세한 기관이다. 보안요원이 한두 명뿐인 유럽 소도시의 박물관들은 미술 도난 사건을 사실상 남의 일, 파리나 뉴욕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그들은 방문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산계급 예술 애호가들의 선량함을 믿었다. 그런데 그건 독자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선함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나 뿌리 깊은 것이어서, 우리는 예술 도둑조차 조금 관대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그건 브라이트비저를 봤던 여러 사람들이 홀린 듯 공통적으로 가졌던 감정이었다.

김영준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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