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utter] 그들의 기부에는 다섯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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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란트로피의 세계

빌 게이츠(왼쪽)와 워런 버핏. [사진 GatesNotes.com]

빌 게이츠(왼쪽)와 워런 버핏. [사진 GatesNotes.com]


전 재산의 90%를 사회에 환원한 ‘19세기 기부왕’ 앤드루 카네기부터, 4년 만에 20조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신흥 강자 매켄지 스콧까지. 세상을 바꾸는 기부자들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등장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빌 게이츠와 마이클 블룸버그를 필두로 새로운 기부 철학과 방식을 가진 ‘뉴 필란트로피스트’(New Philanthropist)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10년 새 이들을 롤 모델 삼는 고액기부자들이 나타나 기부 생태계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뉴 필란트로피스트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은 어떤 기부를 하고 있을까.

국내 소셜섹터 전문가 5인(도현명 임팩트스퀘어 대표,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대표, 임성택 지평 대표변호사,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 허재형 루트임팩트 대표)의 도움을 받아 국내외 뉴 필란트로피스트들의 기부에서 발견되는 다섯 가지 공통점을 정리했다.

누가 ‘뉴 필란트로피스트’인가

전문가들은 빌 게이츠, 멜린다 게이츠, 마이클 블룸버그, 워런 버핏, 피에르 오미디아르, 크리스토퍼 혼, 일론 머스크, 피터 디아만디스, 매켄지 스콧 등을 뉴 필란트로피스트의 대표 주자로 꼽았다. 국내 인물로는 김범수·김봉진·김강석·이재웅·정경선 등을 거론했다.

이들의 기부에서 찾아낸 첫 번째 공통점은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뉴 필란트로피스트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목표로 하며 기후위기·교육격차·소득불균형 등 거대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장기적인 기부 전략을 수립한다.

단일 프로젝트나 목표에 대규모 자금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빅벳필란트로피(Big Bet Philanthropy)’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빌 게이츠가 소아마비 종식을 목표로 20년에 걸쳐 62억 달러(약 8조3000억원)를 투입한 게 대표적 사례다. 빌게이츠재단의 노력으로 소아마비는 전 세계에서 사실상 종식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범수 설립자가 만든 브라이언임팩트가 최초로 ‘프리빅벳’ 단계의 필란트로피를 실험 중이다. ‘임팩트그라운드’ 사업을 통해 스케일업이 필요한 비영리단체에 최대 수십억 원까지 자금을 지원한다.

두 번째, 관행을 깨는 새로운 기부 방식을 취한다. 임성택 변호사는 “매켄지 스콧의 행보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했다. 스콧은 2019년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와 이혼하면서 약 360억 달러(약 50조원)의 재산을 분할받았고, 그해 곧바로 ‘재산 절반 기부’를 선언했다. 임 변호사는 “기부 규모나 속도도 놀랍지만 기존의 기부 관행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부한다는 게 흥미롭다”면서 “조용한 심사를 통해 깜짝 기부를 하고 최근에는 ‘공개 오디션’을 통해 숨은 단체들에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관행 깨는 기부 방식…뉴 필란트로피스트가 온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피에르 오미디아르, 멀린다 게이츠, 김강석, 빌 게이츠, 마이클 블룸버그, 김봉진, 설보미, 매켄지 스콧.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피에르 오미디아르, 멀린다 게이츠, 김강석, 빌 게이츠, 마이클 블룸버그, 김봉진, 설보미, 매켄지 스콧.

또 다른 기부자를 탄생시킬 촉매제

세 번째 공통점은 기부한 조직의 전문성과 경험을 존중하며 신뢰 기반의 파트너십을 맺는다는 점이다. 기부자가 직접 사업을 추진하기보다는 사회문제를 잘 해결할 역량 있는 조직을 선택하고 이들을 돕는 역할을 자처한다.

방대욱 대표는 “기부자와 단체가 끈끈한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필란트로피의 핵심”이라면서 “기부자는 믿어야 하고 단체는 그 믿음에 걸맞은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는 “기부자의 ‘선함’과 기부받는 쪽의 ‘탁월함’이 만났을 때 서로 믿고 기부하는 신뢰 자본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네 번째, 사용처에 제약이 없는 유연한 기부금을 제공한다. 국내에서는 김강석 블루홀(현 크래프톤) 공동창업자가 만든 ‘IP1 기금’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비영리 생태계는 왜 지속가능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그는 비영리로 흘러가는 ‘자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금 사용처에 제약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비영리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난 2022년 36억원을 출연해 IP1 기금을 조성하고 루트임팩트에 운영을 맡겼다. 이 기금은 비영리 조직 10곳에 각각 최대 3억원의 제약 없는 자금을 제공할 계획이다.

황신애 이사는 “기부자가 돈의 쓰임을 통제하지 않고 단체가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게 자유를 주면 갑작스러운 위기나 기회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면서 “제약 없는 기부금은 단체가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고 지속가능성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다섯 번째, 잘 알려진 단체보다 혁신적인 솔루션을 가진 새로운 기부처를 선호한다. 도현명 대표는 “뉴 필란트로피스트는 어젠다를 발굴하고 선도하고 싶어 한다”면서 “자원의 투입만으로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솔루션의 혁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지도 높은 비영리단체, 대학교 등을 제쳐두고 비영리스타트업, 새로운 이니셔티브, 임팩트스타트업 등에 기부하는 이유는 당장의 아웃풋보다 임팩트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재형 대표는 “이런 기부자들이 늘어난다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들도 더 다양해질 수 있다”면서 “사각지대에 있는 문제까지 구석구석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임성택 대표는 “이전까지 한국의 기부자들은 주로 자선적 기부에 집중했다”며 “급한 불을 껐지만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뉴 필란트로피스트의 등장이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문제를 보는 관점을 바꾸고 기부 관행에 변화를 일으켜 지속가능한 비영리 생태계를 만드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허재형 대표는 뉴 필란트로피스트를 ‘혁신가(innovator)’라 표현했다. 그는 “혁신가를 따르는 또 다른 혁신가들,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들에게 좋은 선례가 되어 더 많은 새로운 기부자가 탄생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셜섹터 용어사전 필란트로피(Philanthropy)를 아시나요?

‘필란트로피’는 한국 사회에서 비교적 낯선 용어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널리는 쓰이는 말이지만 한국어로는 정확히 대체할 단어가 없다. 자선·기부·박애·나눔 등으로 풀이되지만 딱 맞는 표현은 아니다.

필란트로피는 채러티(Charity)와 자주 비교된다. 채러티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 대한 동정심·측은지심에서 비롯된 기부나 도움을 뜻한다.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한 자선 행위로,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필란트로피는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 필로스(Philos)와 인류를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가 합쳐진 말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인류애를 기반으로 사회적 약자의 삶에 관심을 갖고 이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전문성 있는 조직에 돈을 기부하거나 공익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필란트로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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