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1889~1945)와 나치 과거사로 극우 세력에 극도로 민감한 독일에서 세계 2차 대전 종전 79년 만에 반(反) 이민, 반 유대주의, 반 이슬람 정책을 내세운 극우 정당이 주(州)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 반면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속한 사회민주당(SPD)과 함께 연정을 구성한 녹색당·자유민주당(FDP) 등 3개 집권당은 모두 득표율 한자릿 수의 참패를 기록했다. SPD가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에 이어 주 선거에서도 완패하며, 내년 총선을 앞두고 숄츠 총리의 정치 생명이 위기에 몰렸다는 관측이 나온다.
1일(현지시간) 독일 공영 매체 도이체벨레(DW)는 이날 구(舊) 동독 지역인 중부 튀링겐에서 진행된 주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이 득표율 32.8%로 1위에 올랐다고 전했다. 독일의 주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에 승리한 건 2차 대전 이후 처음이다.
2위인 중도 우파 성향의 기독민주연합(CDU)은 득표율 23.6%로 AfD에 10%포인트(P) 가까이 뒤처졌다. 급진 좌파 성향의 자라 바겐크네히트동맹(BSW)은 15.8%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반면 숄츠 총리가 소속된 SPD를 포함한 녹색당·FDP 등 ‘신호등 연정’ 소속 3당은 모두 한자릿수 득표에 머물며 참패했다.
선거 결과에 따라 AfD는 튀링겐주 의회 의석 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독일에선 판사 등을 임명하려면 주 의회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데, AfD는 이처럼 다수결이 필요한 결정을 좌우할 권한을 갖게 됐다고 DW는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런 변화는 독일 사회가 극우 세력을 견제하고 억제하기 위해 오랜 시간 구축한 체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튀링겐주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AfD의 공동 대표인 티노 추루팔라는 “유권자는 ‘정책을 바꾸라’는 분명한 의지를 표시했고, 우리는 튀링겐을 통치할 사명이 있다”며 집권 의지를 밝혔다. 튀링겐주 AfD 대표이자 주총리 후보인 비외른 회케 역시 “우리는 튀링겐이 1위 정당”이라며 “연정 파트너를 찾겠다”고 강조했다. 신나치를 연상시키는 선동적 언사로 악명 높은 회케는 선거 유세와 당내 행사에서 나치 구호를 사용한 혐의로 올해만 두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인물이다.
"극우, '역사적 승리' 거뒀지만 야당 머물 것"
이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AfD가 선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야당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AfD는 단독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과반 득표는 얻지 못한 상황이고, 다른 정당들은 AfD와 손잡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기 때문이다.
다만 AfD가 30%가 넘게 득표하면서, 이를 배제하고 기존 주류 정당간 연정을 구성하는 셈법도 복잡해졌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매체는 “(2위 정당인) CDU는 인기없는 숄츠의 SPD를 배제하고 싶어하지만, AfD를 제치고 연정을 구성하려면 SPD의 도움이 무조건 필요할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어 “지루한 녹색당을 또 끌어안을지, 아니면 녹색당을 쳐내고 까다로운 BSW와 손잡을지도 선택해야 한다”면서 “CDU 입장에선 ‘전염병’이냐 ‘콜레라’냐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셈”이라고 전했다.
같은날 동부 작센의 주의회 선거에서도 AfD(30.6%)는 CDU(31.9%)에 1.3%P 차로 뒤진 2위를 차지하는 등 선전했다. 오는 22일 동부 브란덴부르크에서 치러지는 주 선거에선 AfD가 1위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숄츠의 SPD, 내년 총선 앞두고 빨간불
반면 숄츠 총리의 SPD는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 때 ‘100년 만의 최악 참패(득표율 13.9%)’에 이어 이번 튀링겐 주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이에 따라 1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도 빨간불이 켜지게 됐다. 최근 ZDF 등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독일인의 70%가 숄츠 총리의 리더십에 불만이 있다고 답했고, 조기총선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숄츠가 이끄는 집권 연정 역시 역대 가장 인기 없는 정부로 추락한 상태다.
이날 숄츠 총리는 성명을 통해 “튀링겐과 작센에서 AfD가 거둔 결과가 매우 걱정스럽다”면서 “우파 극단주의자가 없는 주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이날 “숄츠 총리가 이끄는 SPD는 1933년, 히틀러에게 입법 전권을 부여해 나치 독일 탄생의 길을 열어준 수권법(전권 위임법) 제정 당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던 정당”이라며 “이런 맥락에서 이번 SPD의 참패가 더 쓰리다”고 논평했다.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이번 선거에 지난달 23일 독일 서부의 졸링겐에서 발생한 무차별 칼부림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해당 사건이 독일 사회에 이민자 범죄에 대한 격렬한 토론에 불붙이며, 현정부 심판론과 극우 돌풍을 강화했다고 전했다.
독일 주류 정치계에 대한 국민의 경고라는 분석도 나왔다. CDU 소속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은 “이는 우리가 무시해선 안될, 마지막 경종”이라며 “독일은 더 이상 중도 정당이 대표하지 않는 나라가 됐다는 사실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타게스슈피겔 신문에 전했다. 이어 “주류 정치권은 자신들이 최근 몇 년 간 보여준 행보가 옳은지, 시민들의 걱정과 두려움을 진지하게 경청했는지 재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