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의 보살, 군에 돈 뿌린다” 간첩? 전두환 처가 식구였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9.03

전두환 비사

전두환 비사를 내 관심에도 추가해드렸어요.

제5부 전두환의 로열패밀리

2회 로열패밀리 직격한 장영자 사건

전두환 장군이 1980년 8월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 친인척들을 연희동 집으로 불러 모았다. 청와대로 들어가기 전 친인척에 당부하는 자리였다.

지금부터는 과거와 다르다. 모두 대통령의 친인척이라는 사실을 명심해 몸가짐과 각오를 달리해야 한다. 나를 만나기 힘들 테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때 한쪽에서 ‘알겠습니다. 형님’이란 소리가 나왔다. 전두환이 정색하고 말했다.

형님이 뭔가. 각하라고 불러. 대통령 주변에서 형님·동생 따지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권위를 내세우는 전두환의 성격이 드러나는 에피소드인데, 친인척을 관리하겠다는 의지도 보인다.(박보균 저 『청와대비서실 3』 참고)

전두환의 ‘정의사회 구현’ 의지 과시

1980년 9월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된 전두환 11대 대통령의 취임을 알리는 초대형 아치가 광화문 이순신 장군상 앞에 펼쳐져 있다. 중앙포토.

1980년 9월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된 전두환 11대 대통령의 취임을 알리는 초대형 아치가 광화문 이순신 장군상 앞에 펼쳐져 있다. 중앙포토.

실제로 전두환은 5공 초만 해도 ‘정의사회 구현’ 의지를 과시했다. 청와대에 들어가기에 앞서 친인척을 불러 주의를 환기시킨 것도 그런 의지였다. 5공의 기획자인 허화평 보좌관 등 신군부 실세들은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의 생명이 ‘정의 구현’과 ‘사회 정화’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정권 초 정의 구현 의지를 과시한 대표적인 사례가 1981년 8월 박세직 수도경비사령관의 전격 예편이다. 박세직은 전두환 대통령의 육사 1년 후배인 12기 중에서 세칭 ‘쓰리 박’이라 불리던 실세였다. 군 핵심 요직을 나란히 맡고 있었던 3명의 박씨는 박세직 수경사령관 외에 박준병 보안사령관과 박희도 특전사령관이었다. 그런데 8월 6일 국방부에서 전격적인 발표문을 내놓았다.

‘박세직 수경사령관이 친구의 개인 사업을 위한 고위층 청탁에 연루돼, 새 시대의 군인상과 군의 위신을 실추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략) 일벌백계의 추상 같은 군율을 수호하기 위해 비록 청탁 행위로 성사된 것은 없었음이 조사 결과 밝혀졌으나 보직을 해임, 예편토록 조치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박세직 대회위원장(오른쪽)이 대회사를 낭독하고 있다.박세직은 5공과 6공에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왼쪽은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 사진 대한체육회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박세직 대회위원장(오른쪽)이 대회사를 낭독하고 있다.박세직은 5공과 6공에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왼쪽은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 사진 대한체육회

박세직이 육사 동기 출신 재미사업가의 부탁을 받고 장관 등 고위직에게 협조를 청탁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청탁이 성사된 것은 없지만 ‘새 시대 군의 위신’을 위해 ‘일벌백계‘한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측근 실세, 하나회 핵심 수경사령관을, 이만한 일로 예편시킨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흔히 말하는 ‘시범 케이스’였다. 전두환은 민간 부분에 간여하려는 군 실세들의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보안사령부에 ‘박세직 조사’를 지시하면서 사령관인 박준병이 박세직의 동기이자 절친이라는 점을 감안해 대공처장에게 직접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수경사에 근무하던 영관급 장교 두 명을 불러 박세직의 최근 동정과 근무 행태에 대해 따로 캐물었다. 그리고 새벽에 직접 보안사에 전화해 ‘박세직 내일 예편’을 통보했다.

그런데 전두환은 불과 7개월 후 박세직을 한전 부사장에 앉혔다. 이어 총무처와 체육부 장관을 시킨 다음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까지 맡겼다. 박세직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시범 케이스 삼아 ‘정의 구현’ 의지를 과시하는 것이 당초 목적였던 셈이다. 실제로 박세직 사건 이후 군 실세들이 병영 바깥 일에 끼어드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장영자 사건과 처가 로열패밀리

1982년 어음사기사건 항소심 법정에 들어가고 있는 장영자. 중앙포토

1982년 어음사기사건 항소심 법정에 들어가고 있는 장영자. 중앙포토

그러나 1982년 장영자 사건은 달랐다. 전두환은 친인척 비리 척결에 온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의 구현’ 차원에서 일관된 일벌백계를 요구하는 개국공신, 특히 허화평과 충돌했다.

장영자는 일찌감치 군 주변에서 요주의 인물이었다. 장영자가 5공 권력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은 1980년 5·17 직후부터였다. 불교 신자인 장영자는 군부대 불사에 거금을 쾌척하며 신군부에 접근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노태우 수경사령관 시절 서울 필동 사령부(현재 남산 한옥마을)에 법당을 건립하는 데 장영자가 2000만원을 시주한 사건이다.

보안사는 ‘미모의 보살이 군부대를 돌면서 거금을 쾌척한다’는 정보에 주목했다. 혹시 ‘간첩이 아닌가’ 하는 대공 용의점에 내사를 했다. 특별한 혐의가 안 잡히자 각 부대에 ‘요주의 인물’이란 지휘서신을 보냈다. 지휘관들에게 ‘접촉하지 말라’는 경보였다.

이 무렵 장영자는 유정회 국회의원 이철희와 동거를 시작했다. 이미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37세 장영자는 1981년 1월 한 사찰에서 조용히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장영자보다 21살이나 많은 이철희는 박정희와 육사 2기 동기로 소장 예편 후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냈다.

장영자는 1980년 8월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를 팔고 다니기 시작했다. 장영자의 형부가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이순자의 작은아버지) 광업진흥공사 사장이었다. 이런 혈연관계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뒤에 ‘청와대가 있다’고 과시했다. 장영자는 1982년 2월 14일 남산의 고급 사교클럽에서 초호화 과시용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정재계 유력 인사 120명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가족 대표로 형부 이규광이 축사를 했다.

장영자의 이런 행적에 청와대가 주목했다. 보안사 수사국장 출신인 이학봉 민정수석은 보안사의 수사기록을 넘겨받아 유학성 안기부장에게 수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별거 아니다’고 보고해 왔다. 제대로 사건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철희가 중앙정보부(안기부 전신) 차장 출신이며, 정보부 출신을 직원으로 데리고 있었기에 제대로 수사가 안 됐다.

결국 사건이 터진 것은 1982년 4월. 피해 기업인 공영토건이 검찰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검찰에서 수사한 결과 어음사기 사건의 실상이 확인됐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장영자가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대검 중수부장이 4월말 청와대로 이학봉 민정수석을 찾아갔다. 청와대의 고민이 시작됐다. 신군부 실세들 사이에서 친인척 처리를 둘러싸고 논쟁이 오갔다. 전두환의 내심을 읽은 이학봉은 사건을 축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강경파 허화평 정무수석과 허삼수 사정수석은 ‘정의 구현’ 원칙론을 굽히지 않았다.

5월 7일 장영자를 구속하고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로 결정됐다. 다시 논란 끝에 5월 12일 중간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영자가 이규광 이름을 팔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론이 악화되고 신군부 실세들 사이에서도 강경론이 커지면서 5월 18일 이규광이 구속됐다. 장영자로부터 억대 금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이규광은 전두환과 왕래를 끊었다. 이규광의 형이자 전두환의 장인이었던 이규동 대한노인회장이 ‘동생의 잘못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1982년 5월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으로 구속되는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가 검찰청 청사를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1982년 5월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으로 구속되는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가 검찰청 청사를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먹칠 당한 5공 ‘정의사회 구현’

장영자 사건은 황당한 사기사건이다. 수법은 복잡하지 않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에 돈(사채)을 빌려주고, 빌려준 돈보다 훨씬 큰 금액의 (견질)어음을 받아내는 수법이다. 장영자는 담보용으로 받은 견질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마련한 자금을 다시 빌려주고 더 큰 금액의 어음을 받아내는 과정을 반복했다.

사건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 과정에서 일부 자금을 주식에 투자하고 일부는 외국으로 빼돌렸다. 기업 입장에선 빌린 돈의 몇 배나 되는 견질어음이 사채시장에서 돌아오니 파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기에 연루된 어음의 총액은 7000억원 규모였다. 당시 장영자 부부가 사기행각을 벌이던 15개월간 쓴 교제비만 49억원이었다. 하루에 1000만원꼴이다. 당시 서울 시내 서민아파트 한 채 가격이 1000만원도 안 됐다.

이런 황당하면서도 대범한 사기극이 가능했던 것은 장영자의 ‘정치적 배후’ 주장이 먹혔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은행이나 모두 장영자의 과시와 으름장에 눌려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한 무리가 쌓이고 눈덩이처럼 구르면서 순식간에 ‘단군 이래 최대’ 사기사건으로 터진 것이다.

당연히 민심이 흔들렸다. 장영자 사건은 ‘청와대가 배후’라고 믿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힘든 황당 사건이었다. 신군부 집권에 편치 않던 여론이었는데 ‘친인척들이 위세를 부린다’는 확신까지 더해졌다. 나아가 ‘신군부 정의 구현도 부패했다’는 인식까지 퍼져 나갔다.

극약처방으로 대통령 압박한 허화평

1981년 12월 전두환 대통령이 허화평 정무수석비서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1년 12월 전두환 대통령이 허화평 정무수석비서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권의 정통성 결핍을 ‘정의 구현’이란 구호로 메우려 했던 신군부엔 심각한 위기였다. 5공의 기획자 허화평은 대통령을 압박했다. 허화평은 이학봉으로부터 장영자 사건 얘기를 듣자마자 ‘언론통제 금지’를 지시했다. 사실상 모든 언론이 정부의 지침에 따라 취재와 보도를 통제받던 시절이라 정부 의지에 따라 사건은 얼마든지 축소 보도될 수도 있고, 아예 보도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화평은 장영자 사건의 경우 언론통제를 못하게 함으로써 모든 언론이 경쟁적으로 취재 보도하게 허용했다. 나아가 허문도 문공부 차관을 통해 적극적으로 언론이 보도하도록 돕기도 했다. 당시 정무수석실 법률비서관 박철언이 기록을 남겼다.

‘조선일보 출신 허문도는 최병렬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의 협조를 얻어 적극적으로 대통령 주변을 비판하는 분위기로 여론을 몰아가는 듯했다. (중략) 허화평과 허삼수는 거의 노골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압박해 들어갔고, 대통령은 분노했다.’(박철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참고)

당시 조선일보 최병렬 편집국장은 신군부 실세인 허삼수, 김진영, 그리고 허문도와 부산고등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했다. 최병렬은 고교 시절 허삼수, 김진영과 함께 육사를 가려고 했으나 교육자인 부친의 반대로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래서 최병렬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동창 군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병렬은 1985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 노태우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보수정치권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대통령이 친인척 문제를 덮고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허화평은 권력의 치부를 드러내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해 판을 키운 셈이다. 사건 보도 열흘 만에 전두환은 이규광 구속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허화평의 언론플레이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허화평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친인척 담당자인 이학봉 민정수석에게 ‘일을 그 따위로 하냐’며 몰아붙였다. 육사 한 기수 후배지만 10·26과 12·12 일등공신 이학봉이 결국 사표를 내게 만들었다. 나아가 허화평은 한발 더 나아가 대통령의 역린(逆鱗)까지 건드렸다. 결국 이학봉의 사표는 반려되고, 허화평이 청와대에서 쫓겨났다.

🔎 등장인물

김진영=1938년 경남 통영 출신. 육사 17기 대표화랑으로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청와대 외곽경비 담당인 33경비단 단장으로 쿠데타 가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로 강제 퇴임.

노태우=1932년 경북 달성 출신. 육사 11기. 전두환 절친으로 하나회 핵심. 12·12 당시 9사단장으로 병력 출동. 대장 예편 이후 내무부 장관과 민정당 대표 역임.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당선. 퇴임 후 반란죄로 무기징역. 2021년 사망.

박세직=1933년 경북 구미 출신. 육사 12기. 1981년 수경사령관으로 소장 예편. 이후 5공 총무처·체육부 장관, 6공 안기부장·서울시장 역임.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1992년 민자당 국회의원으로 당선, 재선 의원. 2009년 사망.

박준병=1933년 충북 옥천 출신. 육사 12기로 하나회 멤버. 보안사령관. 대장 예편 후 민정당 국회의원 사무총장. 자민련 부총재. 2016년 사망.

박희도=1934년 경남 창녕 출신. 육사 12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제1공수여단장으로 병력 출동해 국방부와 육본 점령. 육군 참모총장. 보수우익 활동가.

이규광=1925년 만주 출신. 육사 3기. 주로 정보 분야에서 활동. 육군 헌병감 준장 예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의 둘째 남동생. 5공 출범 후 광업진흥공사 사장 역임. 1982년 처제 장영자가 저지른 어음사기 사건에 연루돼 구속. 2012년 사망.

이규동=1911년 경북 고령 출신. 일제하 만주로 이주해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 만주국 육군 복무. 해방 후 육사 2기 졸업 후 육군 경리감 역임. 준장 예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대한노인회장 역임. 2001년 사망.

이철희=1923년 충북 청주 출신. 육사 2기. 육군첩보부대장. 1973년 소장 예편. 중앙정보부 차장. 박정희 정권 말기 유정회 국회의원. 1981년 1월 장영자와 결혼. 그해 6월 대화산업 회장 취임. 1년 만에 어음사기사건으로 구속. 2014년 사망.

이학봉=1938년 부산 출신. 육사 18기. 보안사 대공처장. 합수부 수사단장. 1980년 준장 예편 후 청와대 민정수석, 안기부 차장, 민정당 국회의원 역임. 2014년 사망.

장영자=1944년 전남 목포 출신. 숙명여대 졸업. 1981년 1월 이철희와 세 번째 결혼. 대화산업 명예회장.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의 아내가 친언니. 1982년 5월 어음사기사건으로 구속. 징역 15년 선고받고 10년 복역하다 가석방. 이후에도 사기사건으로 3차례 더 구속 수감.

최병렬=1938년 경남 산청 출신. 서울대 법대 졸업. 1963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1980년 편집국장. 1985년 민정당 전국구 의원. 노태우 대통령 정무수석. 문화공보부·노동부 장관. 1992년 민자당 전국구 의원. 서울시장. 1996년 신한국당 국회의원. 2000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2003년 한나라당 대표. 2022년 사망.

허문도=1940년 경남 고성 출신. 서울대 농대. 조선일보 기자 일본 특파원. 일본 주재 해외공보관. 전두환 중앙정부부장 서리 비서실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문화공보위원. 5공 청와대 공보비서관, 문공부 차관, 정무수석, 통일원 장관 역임. 여러 차례 출마했으나 낙선. 2016년 사망.

허삼수=1936년 부산 출신. 육사 17기 하나회.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12·12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 강제연행. 전두환 정권 사정수석비서관. 친인척 비리 처벌 주장하다가 사직 후 미국행. 1992년 민자당 국회의원. 장애인 인권운동가.

허화평=1937년 포항 출신. 육사 17기.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10·26 이후 5공 출범까지 신군부 핵심 브레인. 준장 예편 후 전두환 대통령 보좌관으로 사실상 비서실장 역할. 이후 정무수석 역임. 전두환과 결별하면서 미국 유학. 귀국 후 고향에서 14대·15대 국회의원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