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오은철을 알게된 건 JTBC ‘슈퍼밴드2’ 때다. 전국구 실용음악 전공자들이 모두 모인 오디션에 보기 드문 클래식 악기 연주자였지만, 오은철의 연주는 전혀 클래시컬하지 않았다. 건반 위에서 현대무용을 하는 듯한 자유롭고 현란한 터치는 밴드 뮤지션들의 연주에 착 감기면서도 화려함을 훌쩍 업그레이드시켰고, 메탈밴드와 팀을 꾸려 우승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밴드 안에 머물기에 오은철의 음악은 그릇이 컸다. 지난해 솔로 음반을 냈고, 9월 7~8일 그 음악을 바탕으로 스토리가 있는 공연 ‘피아노 파드되’를 올린다. ‘파드되’란 발레에서 2인무를 뜻하는데, 피아노가 공연의 주인공으로서 또 다른 아티스트의 창작과 2중주를 한다는 은유다. 파트너는 발레리노 김용걸 한예종 교수다.
그는 오은철의 음악을 듣자마자 ‘발레리노가 되고 싶었던 피에로’의 이야기로 스토리라인을 짰다. 화제의 발레리노 전민철을 비롯해 한예종 무용과 학생들로 구성된 K-Arts Ballet가 춤으로 펼쳐 보이는데, 피아노가 시작 전부터 끝난 다음까지 객석을 놔주지 않는 게 관전포인트다.
“피아노가 중심이 되어 공연을 끌어가고 싶어요. 보통 공연은 객석 입퇴장 때 음악이 없거나 대중음악 콘서트에선 앨범수록곡을 틀지만, 저는 이 무대를 위한 음악을 담고 싶어서요. 공연의 분위기를 암시해주는 인트로부터, 인터미션에는 1부와 2부 사이 계절의 흐름을 표현하고, 아우트로에서도 좋은 추억으로 여운을 남기려는 거죠. 관객이 문을 들어온 순간부터 무대의 시작이 되게 하려고요. 그런 공연이 없었으니 시도해볼만 하지 않나요.”
사실 오은철은 10여년 전 302만뷰를 기록한 ‘선화예고 점심시간’ 영상의 주인공이다. 악보도 없이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를 즉석에서 합주하는 소년들의 빛나는 재능이 마치 청춘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해 화제를 모았다. 그 영상 속에서 신들린 즉흥 피아노 연주로 혼을 쏙 빼놓은 소년이 바로 그다. “예고도 점심시간엔 남자애들이 축구하러 다 나가는데 그날은 비가 와서 못나갔어요. 제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니 한명씩 붙은건데, 누군가 찍어서 싸이월드에 올려 좀 핫했죠. 당시 방송 섭외도 받았는데 어머니 선에서 자르셨더라고요.(웃음)”
신들린 연주가 딱 피아노 신동 포스였지만, 그의 선택은 작곡이었다. “무궁무진하게 자유로운 음악을 하고 싶어서”다. “제가 중2 때 예중에 편입을 했어요. 원래는 피아노 전공을 하고 싶었지만 편입 때 실력이 부족하니까 작곡과로 들어가서 전과를 하려 했죠. 그런데 전공생들이 하루종일 갇혀서 연습하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 행복해보이진 않았어요. 연습곡이나 표현 면에서 억압받는 느낌이랄까. 물론 한 악보를 두고 자기만의 연주방식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음악 자체를 무궁무진하게 자유로운 것으로 두고 싶었거든요.”
까칠한 음악가들과 달리 서글서글한 게 매력이지만, 오은철은 천재가 맞다. 작곡가 데뷔도 연세대학교와 인디애나주립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하기도 전에 이뤄졌다. 중 3때 국립경찰교향악단 위촉으로 쓴 ‘Voyage to the Sunrise’라는 관현악곡이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된 것이다. “선화예중은 악기별 실기 1등에게 오케스트라와 협연 기회를 주거든요. 작곡 전공은 관현악곡 쓰기가 중학생에게 버거우니까 예외였는데, 감사하게도 선생님이 조심스레 제안을 해주셨어요. 오히려 저는 너무 신이 났고, 그때 엄청 공부가 됐죠. 최근에 선화 50주년 합창곡을 위촉받아서 연습 때 갔더니 그때의 지휘자 선생님이 계시더군요. 감회가 새로웠죠.”
지난해 5월 발매한 첫 솔로 앨범 ‘Moments’는 서정적인 뉴에이지풍이다. 그런데 자유롭고 싶다고 자기 음악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다른 아티스트와 영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잠재력을 발굴함으로써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는 콜라보 지향형이다. “피아노는 다른 악기나 보컬과 콜라보할 때 시너지가 큰 악기고, 저도 상대방의 잠재력과 음악성을 끄집어내는 걸 좋아해요. ‘이 사람은 이렇게 들춰내면 정말 멋있겠다, 이렇게 해보자’ 하는 게 피아노를 치면서 얻게 된 좋은 직업병이죠. 최근엔 포레스텔라 강형호 형의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했는데, 기타리스트들과 호흡 맞추고 머리 흔들면서 연주할 때 하늘을 나는 느낌이었어요. 형도 저한테 에너지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의 작품이 다른 장르의 창작으로 이어진 ‘피아노 파드되’ 공연은 더욱 특별하다. “늘 누군가를 위한 작업을 해왔지만, 제 음악에 누군가 영감을 받아 새로운 창작을 한다는 게 살면서 가장 뿌듯한 일인 것 같아요. 중학교 때부터 제 꿈은 하나였거든요. 존 윌리엄스의 ‘올림픽 팡파레’처럼 내가 작곡한 거대한 스케일의 음악을 직접 지휘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다른 예술가들에게 좋은 영감을 주고 싶은 꿈도 생겼습니다.”
오은철의 ‘피아노 파드되’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매번 새로운 무용계 창작자와 의기투합해 색다른 이야기를 펼쳐낼 것이란다. 첫 파트너인 ‘K-남성발레’의 대명사들이 어떻게 문을 열지, 앞으로 이 프로젝트가 음악계와 무용계에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갈지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