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북·중 국경 지역에 라디오 방송 등을 위한 무선국을 설치하려는 계획에 북한이 국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가운데 해당 사안을 관할하는 국제기구가 북한의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29일(현지시간) 중국이 무선국을 설치하기 위해 북한과 사전에 조율할 의무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미국의소리(VOA)가 30일 보도했다.
ITU 대변인은 VOA의 관련 서면 질의에 “북한 혹은 중국의 87.5~108MHz 범위 내 FM 방송국은 ITU 주파수 계획이나 의무 조율 절차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며 “이들 나라에서 사전 조율 없이 FM 방송국을 운영하는 것은 ITU의 전파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다만 “주파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양국 간 조율은 매우 바람직하고 권장되는 바”라고 덧붙였다.
앞서 북한은 지난달 24일 ITU에 e메일을 보내 “중국이 계획 중인 무선국 가운데 단둥 기지국을 포함해 17개 기지국이 ‘심각한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며 중국의 국경 부근 통신시설 설치 계획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중국이 사전 조율을 요청한 적이 없으며, 이는 ITU 지침을 위반한다”면서다.
이에 대해 ITU가 양국 간 조율은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일 뿐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것인데, 북한은 관련 규정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고 우선 반대 입장부터 낸 셈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반(反)사회주의·비(非)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있다면 대표적인 우방이자 혈맹인 중국의 콘텐트도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양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해 외부 문물의 유입을 차단하는 가운데 주된 타깃인 한류(韓流)만 단속해서는 주민들의 사상 이완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 입장에선 중국을 통해 유입되는 중국산 영상물을 포함해 불순한 정보가 담긴 콘텐트를 차단할 필요성이 커졌을 것"이라며 "북한 당국도 완벽하게 외부 정보의 유입을 막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이 최근 중류(中流)까지 단속의 범위를 넓혔다는 소식통들의 전언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중앙일보 7월 31일 1·4면〉
여기에는 최근 이상기류를 보이는 북·중 양국 간 관계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중국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5월 중국 다롄(大連) 방문 당시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과 산책하며 친교를 쌓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발자국 동판'을 지난 5월 제거했다. 지난달 초에는 중국이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인 자국 내 북한 노동자를 모두 귀국시킬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 북한은 지난 5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중 정상회의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포함한 공동선언을 채택하자 당일 밤 군사정찰위성 2호를 즉각 발사했다. 김정은이 직접 중국에서 근무 중인 자국 외교관들에게 "중국 눈치를 보지 말라"는 취지의 지시도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달 말 북한 북부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수해도 일정 부분 소원해진 북·중 관계와 무관치 않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있다. 압록강 하류 저지대에 위치한 북한 신의주·의주 일대의 피해가 더 크게 발생한 건 중국이 홍수 방지를 위해 높게 쌓아 올린 제방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지대인 북한 지역으로 역류를 촉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임을출 교수는 "북·중 접경지역에서 발생한 이번 수해는 상대적으로 소원해진 북·중 관계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