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과 사천의 다솔사
나혜석(1896~1948)의 ‘다솔사 풍경’이라는 작품이 있다. 작품 이미지는 알려졌지만, 직접 이 작품을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개인이 소장한 이 작품은 한 공공미술관에서 수집을 고민했다가 무산되었다고 한다. 나혜석의 진품인지를 확신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혜석의 전문 연구자들조차 그의 작품 진위를 따지는 것은 쉽지 않다. 나혜석의 확실한 기준 작품이 적은 데다가, 진품이라고 여겨지는 작품조차 화풍이 매우 달라서, 어떤 양식이 나혜석의 진짜 모습인지를 판가름하기가 어렵다.
효당 등이 민족의식 고취 다솔사
항일 결사 ‘만당’의 근거 역할도
친일 변절 애인 고발한 나혜석
효당이 주지였던 다솔사 찾아가
망국의 통한 스민 ‘다솔사 풍경’
진위 따져 공공에서 수집해야
이런 경우 진위 판단을 위해서는 흔히 말하는 ‘작품 소장 이력(provenance)’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그래서 한번 조사해 보았다. 나혜석은 어떤 인연으로 다솔사에 갔을까? 이 작품은 어떤 상황에서 그려졌으며, 어느 경로를 거쳐 지금 여기 있는 것일까?
나혜석 이혼 고뇌 불교로 달래
나혜석은 1931년 이혼한 후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서 지냈다. 여자 미술학사를 개설하여 경제적 독립을 도모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이혼녀에게 자녀를 보내 미술 공부를 시킬 부모는 당시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온갖 고뇌에 빠져있던 나혜석은 집 근처 각황사(현 조계사)에서 불교 강좌를 들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이 무렵 자신을 지탱시킨 것은 ‘작가적 예술혼’과 ‘불교적 보리심’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바로 이때 각황사 강좌를 통해 나혜석이 만난 스님 중 하나가 효당 최범술(최영환, 1904~1979)이었다. 그는 경상남도 사천 출신으로, 다솔사에서 불교에 입문했고, 일본 다이쇼 대학을 졸업했던 불교계의 청년 엘리트였다. 만해 한용운이 “생전에 골육(骨肉)과 같이 아끼던” 애제자였고, 한용운의 저작 원본을 인계받아 ‘한용운 전집’을 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1930년부터 고향 사천의 다솔사 주지로 있었기 때문에, 나혜석도 그 절을 찾아갔던 것이다.
나혜석은 1930년대 내내 절 근처를 맴돌았다. 그가 가장 가까이 지낸 절은 충남 예산의 수덕사였다. 만공스님이 주지로 있었고, 나혜석의 절친이자 우리나라 1세대 신여성 김일엽이 수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공은 만해 한용운과 평생 동지적 관계에 있었던 선승이다. 그는 김일엽을 비구니로 받아들였지만, 나혜석이 머리를 깎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나혜석 스스로도 진심으로 비구니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던 듯. 그러기에는 나혜석의 ‘자아’가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서 작품을 제작하면서, 만공과 일엽을 만나는 것이 나혜석의 일상이었다. 김일엽이 일본인 귀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태신(일당스님)이 성장하여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 친구 나혜석이 수덕여관에서 대신 그를 맞아주곤 했다. 나혜석은 김일엽이 입산했던 1933년부터 수덕사를 드나들었고, 1938년부터 1944년까지는 거의 수덕여관을 거점으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혜석은 해인사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가 ‘해인사 풍광’이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 1938년이었다. 해인사에서 그는 가사를 걸치고, 임환경 스님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 즉 해인사의 홍제암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들 옆에 사명대사의 부도가 무심히 서 있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는 이 사진의 숨겨진 의미를 잊었는지 몰라도, 당시 일제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일제는 해인사의 사명대사 비석을 네 동강 냈고, 임환경과 이고경 같은 해인사의 고매한 스님들을 검거했다. 1943년 이른바 ‘해인사 사건’이었다.
해인사 사건 때 다솔사의 효당스님도 함께 붙잡혀 갔다. 일제가 파악한 대로 이들은 모두 ‘한패’였다. 해인사 임환경 스님의 직계 제자가 바로 효당이었던 데다가, 1930년대 다솔사와 해인사는 강학을 통합 운영했을 만큼 가까웠다. 1933년 다솔사에서 시작된 ‘다솔강원’은 민족 지사들의 집결지였다. ‘3범’이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이 강학을 이끌었다. 효당 최범술, 범산 김법린, 그리고 김범부(소설가 김동리의 형). 이들은 다솔사를 거점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저항 정신을 키우는 데 힘썼다.
무엇보다 다솔사는 만당의 근거지였다. 만당은 만해 한용운을 추종하는 불교계 청년 엘리트들의 비밀결사 단체. 공식적으로는 1932년 해체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일제 말까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비밀리에 운영되었다. 김태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조직적으로 독립자금을 모았으며, 한용운을 통해 중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했다.
만공스님 불사에 500원 쾌척
나혜석이 1930년대 만당 주변의 인물들을 따라 이동했던 사실은 중요하다. 잘 알려진 대로, 나혜석의 이혼은 한때 3·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의 거두 최린과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나혜석이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을 정조유린죄로 고발한 것은 1934년의 일. 이혼하고도 3년이 지나 새삼스레 고소를 진행한 데에는 여러 개인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바로 그 무렵 최린이 친일파로 돌아섰던 사실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나혜석은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받았다.
친일파가 된 최린에게는 악착같이 돈을 받아냈던 나혜석이지만, 만해의 동지인 만공에게는 시주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43년 만공스님과 간월암 불사에 500원(현재 돈으로 약 3500만원)을 시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해인사 사건으로 만당 세력 대부분이 감옥에 끌려가자, 만공은 간월암에 들어가 구국을 위한 천일기도를 올렸다. 나혜석은 이를 위한 돈을 댔던 것.
최린과 한용운은 함께 3·1운동을 일으킨 동지였지만, 1933년경 이후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속하며 가난한 생활을 한 한용운에게 최린이 돈을 전달하자, 한용운이 최린을 찾아가 그의 얼굴에 돈을 뿌린 일화는 유명하다. 이 시기 나혜석 또한 최린과는 원수가 되었지만, 한용운의 추종 세력과는 가깝게 어울렸다. 불륜 사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엄청난 사회적 지탄을 받았을지언정, 나혜석은 최소한 최린처럼 조국을 배신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동리 ‘등신불’ 소재 다솔사에서 얻어
나혜석의 풍경화를 인연으로 다솔사를 찾아갔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4년(503년)에 건립된 것으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자장법사·의상대사·도선국사·나옹화상 등 역대 최고 고승들이 중창을 거듭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강원(講院)으로 유명한 만큼, 특이하게도 커다란 강당 ‘대양루(大陽樓)’가 절 입구에서 제일 먼저 위용을 드러낸다.
다솔사 한편에는 ‘안심료(安心寮)’라는 생활공간이 있다. 한때 한용운이 기거했던 곳이고, 나중에 소설가 김동리가 ‘등신불’의 아이디어를 얻은 장소다. 충격적인 소설 ‘등신불’은 안심료에서 ‘3범’이 중국의 ‘소신공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김동리가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 듣고 지은 것이라 한다. 안심료 마당에는 만해 한용운이 1939년 환갑잔치를 벌인 기념으로 식수한 측백나무가 서 있다. 한용운은 환갑잔치를 여러 번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공개적으로 동지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혜석의 작품 ‘다솔사 풍경’은 한때 대양루에 걸려 있었다. 효당의 제자이자 부인인 채원화 원장(반야로차도문화원)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작품 훼손을 막기 위해 1960년대 이후 작품을 자기 방에 걸어두었는데, 효당이 1975년 이 작품을 변종하에게 양도했다. 변종하는 평생 효당을 따르고 지원했던 예술가 중 하나였다. 작품을 인수한 그는 작품 뒷면에 “다솔사 풍경, 고 나혜석 작, 1975년 1월, 변종하 지(誌)”라고 적어두었다. 이후 작품은 다시 현재의 개인 소장가에게 넘겨졌다.
작품의 화면 오른쪽에 비스듬하게 그려진 누각이 바로 이 작품이 걸려 있었던 ‘대양루’. 1930년대 애국지사들이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핏대를 올렸던 강당 건물이다. 나라 잃은 통한의 시대, 선조들의 뜨거웠던 결의가 이 정성스러운 작품 속에 아스라이 녹아있는 것만 같다. 이제 이 작품의 진위여부를 다시금 공론화하여, 공공미술관에서의 수집이 재검토되기를 기대해본다.
김인혜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