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더 살 수도 있는데, 병원 나가랍니다" 벼랑 끝 말기암 환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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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없이 비어있는 한 대학병원 병실. 송봉근 기자

환자 없이 비어있는 한 대학병원 병실. 송봉근 기자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에서 수술·항암 치료를 받은 말기 암 환자 A씨는 최근 호흡곤란 등이 심해졌다. 결국 응급실을 통해 이 병원에 다시 입원해야 했다. 하지만 2주가 지나자 병원 측은 "우리가 해줄 게 없다"면서 퇴원을 요구했다. 병원 밖으로 떠밀린 A씨의 보호자는 "병원에서 급성기 환자 위주로 본다면서 이상 증세가 있는데도 나가라는 건 이해가 안 된다. 다른 곳에 가려고 해도 타 병원 항암 환자들은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의료 공백이 반년을 넘어서면서 그간 어렵게 치료를 이어가던 중증·말기 환자들도 벼랑 끝에 몰리고 있다. 말기 암 환자의 입원치료 중단이 늘고, 새 치료법을 시도해볼 임상시험 참여 기회가 줄어드는 식이다.

대형병원들은 전공의 이탈 등에 따른 의료진 부족, 입원 축소 등을 이유로 말기 암 환자의 퇴원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른 병원도 비슷한 상황이라 이들 환자가 택할 수 있는 건 호스피스 병동 정도다. 하지만 병원 입원실을 벗어나는 순간 환자나 보호자의 치료 의지는 확연히 꺾인다고 한다. 안 그래도 약해진 환자 삶의 불꽃이 빠르게 사그라지는 셈이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장은 "의료공백 전에는 설령 손을 더 쓸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한두 번 정도 항암 치료를 더 해줬다. 막힌 담도관을 시술로 뚫어줘 통증을 없애주는 등 여러 처치가 이뤄졌다"면서 "지금은 '나가달라, 호스피스 동으로 가라'는 식으로 치료 과정을 끊어버린다. 입원치료로 한두 달이나 6개월, 1년을 더 살게 된 분들도 있는데 이런 기회가 싹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환자단체 집회. 김종호 기자

지난달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환자단체 집회. 김종호 기자

중증·말기 환자가 갖는 희망의 끈 중 하나인 임상시험도 불안하다. '빅5' 등 대형병원에 가야 그나마 대규모 임상시험 등을 할 수 있지만, 전공의 부재 등으로 신규 환자를 받지 않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해당 병원 환자로 등록되지 않았다면 임상시험 참여 기회를 얻기도 쉽지 않은 셈이다. 4기 암 환자 등은 다른 치료제가 나오기 전에 '징검다리'처럼 임상시험을 택하는데, 그 다리마저 흔들리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청한 부산대병원 교수는 "임상시험을 하려면 환자에게 예상 효능·부작용 등 설명할 게 많고 절차도 복잡하다. 의료공백 장기화 속에 진료·당직하기 바쁜 교수들로선 신규 임상시험 환자는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관계자는 "현 수치상으론 임상시험 건수가 이전보다 줄진 않았지만, 빅5 병원에선 신규 환자가 없어 새 임상시험 참여자도 감소한다는 걱정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상시험 준비에 6개월~1년 걸리는 걸 고려하면 올 하반기나 내년 초엔 의료 공백 여파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생명을 연장할 방법도 못 써보고 환자가 그대로 죽을 수 있는 만큼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의료공백이 더 길어지면 응급 환자 등과 비교해 중증·말기 환자의 우선순위는 더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특히 치료가 쉽지 않은 이들은 '을'의 입장인 만큼 의사·병원에 강하게 치료를 요구하기도 쉽지 않다. 새로 나오는 환자만큼 기존에 있던 환자를 살리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재학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장은 "의료공백 사태가 빠르게 해결돼야 노심초사하는 환자들이 그나마 마음 놓고 진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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