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군을 방문하면 숫자 ‘55’를 자주 마주친다. 호국평화기념관에 걸린 대형 태극기, 낙동강변 평화분수의 물기둥, 다부동 전적기념관의 기념탑 높이가 모두 55m다. 왜일까? 한국전쟁 초기 55일간 이어진 낙동강 방어전의 중심이 칠곡이기 때문이다.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을 방문하면 74년 전 처절했던 역사를 곳곳에서 마주한다. 호국·평화·안보 같은 말이 딱딱하고 고루하게 느껴진다고? 지난 7~8일 칠곡을 둘러보니 그렇지 않았다. 몰랐던 역사와 아픈 과거가 생생히 눈앞에 펼쳐져 외려 흥미진진했다.
대구 수성 위한 최후의 보루
“8월 15일 안에 부산을 점령한 뒤 서울에서 조국 해방 5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1950년 7월 20일 충북 충주의 전선사령부를 방문한 김일성이 명령했다. 6월 25일 남침을 강행한 북한은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했고 이후 무서운 속도로 남진했다. 남한 국토 90%를 북한에 점령당했을 무렵, 한국의 임시 수도는 대구였다. 대구는 사수해야 했다. 대구마저 뚫리면 부산까지 금세 밀리고, 그러면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대로 끝날 터였다. 하여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마산에서 칠곡 왜관읍까지 남북으로 약 160㎞, 왜관에서 영덕까지 동서로 약 80㎞에 달하는 전선이었다.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의 격전 끝에 북한군은 패퇴했고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낙동강 방어전을 요약하면 이렇다. 그러나 당시 전투는 몇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처참했다. 낙동강변에 자리한 호국평화기념관을 방문하면 시청각 자료를 통해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사용했던 무기와 전투복, 탄피와 구멍 난 헬멧 등을 전시했다. 가산면 다부리에 자리한 ‘다부동 전적기념관’도 가봐야 한다. 대구로 가는 길목인 다부동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전적기념관 마당에 헬기·장갑차 등을 전시했고, 백선엽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동상도 세웠다. 당시 준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이 다부동 전투를 지휘했다. 황나연 전적기념관 과장은 “기념관 한편에 신원을 알 수 없는 259점의 유해를 묻었다”며 “매해 6월 추모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15번 주인 바뀐 고지전
광범위하게 벌어진 낙동강 방어전에서도 가장 많은 병력이 투입된 건 다부동 전투였다. 한국군과 미군 6개 연대, 북한군 3개 사단이 맞붙었고 아군 사상자 1만 명, 북한군 사상자는 1만7000명에 달했다.
‘328고지’는 생지옥이 다름없었다. 12일간 고지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뀌었을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낮에는 미군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융단 폭격을 가했고, 밤에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끝난 뒤 고지를 찾은 미군은 골짜기마다 30~40구의 시신이 쌓여 있는 걸 확인했다.
산자락의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도 산을 오르길 꺼렸다. 안수찬(61) 망정1리 사무국장은 “나무를 하다가 유해가 나오는 일이 흔했고, 밤에는 도깨비불이 보여 혼비백산하기도 있다”며 “불발탄을 건드렸다가 사망한 주민도 있었다”고 말했다.
328고지를 올랐다. 2000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는 현장을 지켜본 뒤 잡초 무성한 ‘애도의 길’을 걸어 산 정상에 닿았다. 높은 산이 아닌데도 경사가 무척 가팔랐고, 아픈 역사가 서려서인지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총탄 자국 선명한 정상부 바위가 시선을 붙들었다.
328고지에는 ‘지겟길’도 있다. 전쟁 당시 망정리 주민이 지게를 지고 식량과 군수품을 한국군에게 날랐던 걸 기억하는 길이다. 주민들은 매해 8월 위령제를 지낸다. 한국군뿐 아니라 북한군 전사자까지 기리는 제사다. 안 사무국장은 “북한군에는 어린 학생을 비롯해 강제 징집된 남한 사람도 많았으니 모든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게 도리”라며 “전쟁터에는 교과서가 알려주지 않는 아픈 역사가 많다”고 말했다.
팔공산국립공원 자락 가산산성
다부동 전투는 최초의 한미 연합전이었지만 산악전은 한국군이 주도했다. 미국 역사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쓴 『콜디스트 윈터』에 따르면 “전차 의존도가 높은 미군에게 한국의 험한 산악 지형은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가산산성으로 유명한 가산(901m)이 바로 한국군이 주도한 격전지다.
가산산성은 요즘 칠곡에서 가장 주목받는 관광지다. 산성을 포함한 팔공산이 지난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이주미 칠곡군 주무관은 “2016년 개통한 천주교 순례길 ‘한티 가는 길’이 가산산성을 지난다”며 “올봄 가산산성 진남문에서 ‘문화유산 야행’도 진행했다”고 말했다.
가산산성은 조선 시대 축조됐다. 내성·중성·외성 세 겹으로 이뤄졌고, 성 안에 칠곡도호부가 있었고 주민도 살았다. 가산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정상까지는 약 2시간, 등산로 대부분이 우거진 숲길이어서 의외로 덥지 않았다. 정상부에 오르니 외성과 이어진 거대한 가산바위가 나타났다. 100명은 거뜬히 오를 정도로 넙데데한 바위에 서니 남쪽으로 대구 시내가 훤히 보였다. 대구를 노린 북한군이 산성을 공략한 건 당연했다.
칠곡의 행정 중심지 왜관읍은 미군이 주도적으로 방어했다. 미군은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막기 위해 왜관철교를 폭파했고 자고산(303m)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낙동강 건너편 북삼읍과 약목면에 주둔한 북한군을 겨냥해 폭탄 960t을 퍼부었다. 자고산 평화전망대에 오르니 미군이 격전을 벌인 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석양 물든 낙동강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 심산했다.
미군부대 앞 햄버거 맛집
왜관읍의 유명 관광지는 대부분 한국전쟁과 관련한 사연을 품고 있다. 이를테면 1895년 설립된 가실성당은 낙동강 방어전 당시 북한군이 병원으로 이용했다. 병원 공격을 금지하는 제네바협약 덕분에 가실성당은 전쟁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북한군이 물러난 뒤에는 미군과 한국군의 야전 병원 역할을 했다. 한국 최초의 수도원인 왜관수도원은 원래 1909년 서울에 지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함경북도 덕원으로 갔다가 1952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매원마을은 조선 시대 영남을 대표하는 반촌(班村)이었다. 전쟁 전만 해도 한옥이 약 600채에 달했으나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됐다. 북한군이 마을에 지휘부를 설치한 걸 알아챈 미군이 융단 폭격을 가했다. 피난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주민들은 60여 채만 남은 채 폐허로 변한 마을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주민 이수욱(77)씨는 “마을뿐 아니라 주변 산자락까지 북한군 시신이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마을에는 포탄 자국이 선명한 건물도 있고, 문화재로 지정된 한옥 숙소도 있다.
왜관읍에는 1959년 들어선 미군 부대 ‘캠프 캐럴’이 건재하다. 왜관이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여서 지금도 병참 기지로 쓰이고 있다. 부대 앞 거리는 이태원 같다. 영어 간판을 건 환전소, 미국식 술집, 햄버거집 등이 줄지어 있다. 1980년 문을 연 ‘한미식당’이 부대 앞 거리 대표 맛집이다. 미군 출신 매제로부터 요리법을 사사한 유건동(73)씨가 딸 유경미(44) 사장과 함께 운영한다. 햄버거와 독일식 돈가스인 슈니첼이 대표 메뉴다. 기름진 음식인데도 뒷맛이 담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