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자 시신이 배가 갈라져 6~7개월 정도 되는 태아가 내장 속에 팽개쳐져 있었다. 그 순간만큼 내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치욕으로 느낀 적이 없었다.”
1923년 간토대지진에 관한 도쿄 내 모든 학살 관련 증언을 담은 책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기록-도쿄지구별 1,100가지 증언』(2016)에 실린 당시 일본인 목격자 증언이다. 책은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를 위해 1982년 결성한 일본의 비영리 시민단체 ‘호센카(봉선화)’가 펴냈다.
다큐 ‘1923 간토대학살’ 광복절 개봉 #김태영 감독 “자료 없다? 日정부 거짓말”
하토야마 전 총리 "조선인 유언비어 日내무성이 유포"
일제강점기인 1923년 9월 1일, 도쿄ㆍ요코하마를 비롯한 일본 간토 지방을 진도 7.9 대지진이 강타했다. 사망자 10만명, 이재민이 340만명에 달했다. 간토 지역에 머물던 조선인들은 더 끔찍한 재앙을 맞았다. 2일 일본 천황의 계엄령 포고 하에 ‘조선인 폭탄을 던져 화재가 계속되고 있다’ ‘우물에 독을 탔다’ 등 유언비어가 퍼졌다. 당시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일본 각지에서 조직된 자경단을 비롯해 군인‧경찰의 총‧칼‧죽창에, 산채로 불태워져 학살된 조선인의 수가 6661명(『독립신문』 보도)에 달한다. 돈 벌러 간 노동자와 유학생, 그 가족이 닥치는 대로 고문당해 잔혹하게 희생됐다. 미국 뉴욕트리뷴, 영국 맨체스터 가디언 등 외신 특파원 기사로도 알려진 내용이다.
그간 일본 정부는 이 간토대학살에 대한 정부 책임설에 “사실관계를 파악할 기록이 없다”(2017, 아베 신조 총리)고 부인해왔다. 그런 일본 정부야 말로 “유언비어를 만든 주체였다”고 주장하는 다큐멘터리 ‘1923 간토대학살’(감독 김태영‧최규석)이 오는 광복절에 개봉한다. 학살 희생자인 남성규 씨의 외손자가 말했듯 간토대학살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다름없는 “인종청소”였음을 희생자 유족, 일본인들의 인터뷰와 시민단체 호센카 등 일본 안팎 민ㆍ관 사료를 통해 펼쳤다.
정성길 계명대 역사ㆍ고고학과 객원교수의 수집 자료 중 1923년 9월 요코하마 부두에 정박했던 영국 기함 호킨스호의 고위 장교가 부둣가에 학살 시신이 쌓인 장면을 촬영한 흑백사진도 중요한 증거다. 공동 연출을 맡은 김태영 감독은 13일 본지와 통화에서 “이 사진을 접하며 느낀 부채감이 다큐 제작으로 이어졌다”며 “이런 비극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역사의 진실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일본 내 주요 인사들도 이례적으로 다큐를 통해 증언에 나섰다. 지난해 요코하마의 조선인 학살을 공식 보고한 가나가와현 정부 문서가 처음 공개되는 등 자국 내에서도 정부의 역사 은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잇따르는 분위기다.
다큐에 출연한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전 총리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 자체를 당시 내무성이 유포했다. 이런 사실을 은폐하려는 목소리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다큐는 또 “3‧1운동으로 조선에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지배층의 공포심, 위기감이 커졌다”(아즈사와 가즈유키 일본변호사연합회 인권옹호위원) “간토대지진 이듬해 일본은 군국주의화로 나아갔다. 만주사태‧위안부‧난징대학살‧진주만공격‧조선인 강제동원의 분수령이 됐다”(일리노이대 동아시아학 이진희 박사) 등 대학살 발발 정황도 제시했다.
"자료 없다, 日 거짓말…6개월 걸려 뒤집었다"
‘1923 간토대학살’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은 사료도 대거 담겼다. 일본 정부 기관인 중앙방재회의 ‘간토대진재 보고서’ 3권 중 제2권 기술이 한 예다. 스즈키 준 도쿄대 일본근대사 교수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군대와 경찰의 보고를 통해 군‧경찰에 의해 살해된 (조선)사람들도 있었다는 점을 거듭 기록”했다. 1923년 11월 22일 뉴욕타임즈가 요코하마 부두 부감독인 미국인 헤드스트롬을 인용해 “가능한 많은 조선인을 죽이라는 공식 명령이 내려졌다” “1923년 9월 2일 250명의 조선인이 5명씩 묶인 채 산채로 불태워졌다” 등 특종 보도한 내용에 더해, 미국 플로이드 톰킨스 목사가 미국 정부에 전달한 이런 학살 참상이 1962년에야 미 국무부 기밀 해제문서에서 발견된 사실도 공개했다.
김 감독은 “‘1923 간토대학살’에 담긴 특종 중 촬영이 가장 힘들었던 건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였다. 자료 열람신청부터 허가까지 촬영에만 6개월이 걸렸다”면서 “일본 정부는 '자료가 하나도 없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막상 찾아보니 당시 군대 관련 증거 기록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큐에서 그는 방위연구소에 보관된 군대보고서에서 간토대지진 당시 계엄군 15연대가 조선인을 총살한 기록을 확인한다. 또 도쿄공문서관서 발견한 ‘관동계엄사령부 상보 제5권’을 통해선 일본 정부의 의도적 기록 삭제 정황을 의심했다. 한때 기밀 문서였던 이 자료는 현재 일반문서로 공개됐지만, 1923년 당시 무기사용 기록 중 제11장 목차와 내용이 모두 잘려나간 상태였다. 김 감독은 “원본이라고 갖고 온 게 1972년 버전이었다. 그 사이 자료가 일부 은폐된 것”이라고 봤다.
日의원 "일본 정부가 사죄할 것 사죄해야"
김 감독은 “일본에도 야마다 쇼지 릿쿄대학교 사학과 교수처럼 역사를 제대로 알고 교훈으로 삼자는 ‘양심’들이 있다. 요코하마에도 ‘가나가와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계 자료’를 알려온 야마모토 스미코씨가 있다”고 현지 일본인들의 노력도 언급했다. 지난 5월 이 다큐가 일본 국회 시사회를 열 수 있었던 데도 스기오 히데야 입헌민주당 의원의 도움이 컸고 한다. 시사회에서 스기오 의원은 “일본 정부도 (조선인 학살을) 인정하고 사실관계를 정밀히 조사해 사죄해야할 것은 사죄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다.
김 감독은 “시사회를 본 NHK‧아사히‧마이니치 등 현지 언론에 자료 공유 요청도 받았다. 자기네들이 못 건드린 부분까지 취재한 것에 놀라더라”면서 간토대지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정을 끌어내는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 내다봤다. “최근 사도광산만 해도 조선인 징용 명단이 있는데도 공개 안 하잖아요. 6600명 넘게 학살한 사료를 쉽게 내놓지 않을 겁니다. 일본 국가 책임을 묻는 모임 다나카 마사타카 사무국장이 다큐 인터뷰에서도 그러죠. ‘만약 정부가 간토대학살을 인정해버리면 일제강점기 식민지에 대한 다른 모든 입장도 바꿔야 한다’고요. 간토대학살 입증이 더욱 중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