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도 파리도 해피엔딩…리디아 고 ‘동화 같은 결말’

  • 카드 발행 일시2024.08.14

2003년 뉴질랜드 북섬 오클랜드 인근 푸푸케 골프클럽. 한 동양인 여성이 여섯 살 난 딸의 손을 잡고 프로숍에 들어와 레슨을 부탁했다. 22세의 젊은 헤드 프로인 가이 윌슨은 거절했다. 소녀는 카운터 너머로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어리고 작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어를 못 했다. 친척이 쓰던 골프채를 가져왔는데 어른용이어서 너무 컸다. 드라이버가 꼬마의 키보다 컸다.

11일 파리 올림픽 여자골프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리디아 고의 연대기를 쓰려면 이렇게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리디아 고의 성장기는 동화 같다. 할머니가 “아이 혼자라 너무 외로우니 한 명만 더 낳으라”고 아들에게 6년을 종용해 태어난 아이가 고보경이다. 언니와 여덟 살 차다.

다섯 살 때 골프채를 잡아봤는데 재능을 보였고 가족은 잔디에서 공을 칠 수 있는 뉴질랜드로 갔다. 그때 찾아가 처음 만난 선생님이 윌슨이었다. 윌슨은 결국 리디아를 가르치기로 했다. 성격이 밝고 착한 데다 재능도 있는 리디아 고에게 금방 반했지만 이렇게 대단한 동화를 쓸 줄은 윌슨도 몰랐을 것이다.

리디아 고는 이듬해 지역 대회에 나가 꼴찌를 했다. 성인 대회에 출전한 일곱 살 소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1등한 선수가 14세의 샤론 안, 한국 이름으로 안신애였다. 리디아 고는 한동안 하늘같은 안신애를 졸졸 따라다니며 함께 연습했다.

리디아 고가 뉴질랜드에서 골프를 배운 푸푸케 골프장. 사진 푸푸케 골프클럽

리디아 고가 뉴질랜드에서 골프를 배운 푸푸케 골프장. 사진 푸푸케 골프클럽

『리디아 고, 10대 골프 천재 소녀의 초상화』를 쓴 뉴질랜드의 기자 마이클 도널드슨은 “2000년대 초 샤론 안, 세실리아 조(조정민), 리디아 고가 차례로 두각을 나타냈다. 세 선수 모두 열심히 했고 최고 자리에 올랐지만 리디아 고는 특별했다. 리디아 고는 수업을 받으면서 새벽과 저녁은 물론 점심시간도 아껴 훈련했다”고 썼다.

2012년 4월 LPGA 투어 롯데 챔피언십이 열린 하와이 코올리나 골프장. 커다란 안경을 낀 10대 리디아 고가 뙤약볕 속에서 벙커샷 연습을 했다. 기자가 “더운데 고생이 많다”고 했더니 소녀는 땀을 닦고 밝게 인사를 했다.

리디아 고는 그날 김효주, 에리야 주타누깐과 동반자로 경기했다. 모두 10대 주니어 아마추어 선수들이었다. 첫날 리디아 고의 성적이 가장 나빴으나 최종 결과는 리디아 고가 가장 좋았다. 가장 어린 리디아 고가 프로 대회에서 4위를 했다.

2012년 15세의 아마추어로 LPGA 투어 캐나디언 오픈에서 우승한 리디아 고. 성호준 기자

2012년 15세의 아마추어로 LPGA 투어 캐나디언 오픈에서 우승한 리디아 고. 성호준 기자

리디아 연대기엔 화려한 선수가 많이 등장한다. 그해 가을 캐나디안 오픈에서 리디아 고는 역대 최연소 LPGA 투어 우승을 했다. 당시 최고 선수였던 신지애는 리디아 고와 챔피언조에서 함께 경기한 후 “어린 선수가 위기에서도 헤드업을 하지 않고 경기하는 모습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리디아 고는 최연소 LPGA 우승, 최연소 여자 메이저 우승, 최초 10승, 최연소 세계랭킹 1위 등의 최연소 기록제조기였다. 17세이던 2014년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에 포함됐다. 2015년 나란히 5승을 한 박인비와 리디아 고의 대결은 LPGA 투어 역사에 남을 최고의 박빙 승부였다.

20대에 리디아 고는 슬럼프에 빠졌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모든 것을 밝게 바라봤던 리디아 고는 어른이 되면서 두려움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았다. 우승은커녕 쉽게 하던 톱10도 하지 못했다. 2020년 마라톤 클래식에서 6홀을 남기고 5타 차로 앞서다 역전패했을 때 리디아 고의 커리어가 끝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리디아 고와 남편 정준씨. 사진 리디아 고 인스타그램

리디아 고와 남편 정준씨. 사진 리디아 고 인스타그램

그런 리디아 고에게 백마 타고 온 왕자님이 나타났다. 2022년 리디아 고는 3승을 하며 부활했는데 그가 다시 우승하기 시작한 건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한 시기와 얼추 일치한다. 리디아 고는 그해 말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의 아들인 정준씨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