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대북공작원 정규필 전 정보사 대령의 증언
」5화. 천안함 폭침 경고한 ‘가미카제 공격’ 첩보
」2010년 7월,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대령 정규필은 밀명을 띠고 베이징(北京)에 내렸다. 대북 공작장교로서 세 번째 중국 파견이다. 선양(瀋陽)의 흑색(1995년, 위장 신분)을 거쳐 베이징의 백색(2002년, 한국대사관 무관보좌관) 요원에 이어 한국대사관 육군무관으로 투입됐다.
정규필(이하 존칭 생략)에게 떨어진 밀명은 남-북 비밀 핫라인을 구축하라는 권력 실세의 지시였다. 이명박(MB) 정부는 1년 전 무산된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을 재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소통 라인이 단절된 상태였다. 북한과의 대화 통로를 뚫고 복원하는 공작이 그의 임무였다.
당시 주중 대사는 MB 정부의 초대 대통령실장을 지낸 류우익이었다. 정규필을 끌어들이는 데는 류우익의 영향이 컸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10년 1월 베이징에서 정보사 흑색 공작원이 작전 중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사건에서 시작됐다. 정규필은 억류된 동료 공작원의 석방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현지로 급파됐다. 베이징 출장 중 그는 류우익과 면담할 기회를 얻었다.
류우익은 중국과 북한 정세에 대한 정규필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듣고 호감을 가졌다. 당시 남북관계는 남북정상회담의 실패 이후 최악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009년 말 부임한 류우익에게 중국과 북한은 낯설었다. 정규필 같은 대북 전문가가 필요했다.
2월 초 공관장 회의에 참석차 서울에 들어온 류우익은 “대중국 외교 및 대북한 정보 수집 역량 강화의 일환”을 명분으로 국방부에 정규필의 베이징 파견을 요청했다. 정규필을 알고 있던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도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이후 정규필이 중국으로 나가게 된 배경이다.
남북 접촉 물꼬…숭례문 금강송
정규필 발탁에는 이유가 있었다. 2009년과 2010년 1년 사이에 남북관계는 달콤한 화해 무드에서 위험한 군사충돌 위기로 치달으며 망나니 춤을 췄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향하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 반전의 스토리는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정부는 화재 수습을 마치고 남대문 복원을 하려는데 주재료로 쓰일 금강소나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마침 북한이 북한산 금강송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의향을 대북사업자 R(당시 46세)을 통해 임태희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에게 타진했다. R은 정규필이 2003년 무관보좌관으로 베이징에서 활동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대북사업가이자 에이전트(정보원)였다.
MB와 북한 조문단 면담의 배경
MB 정부로서는 남북 간 화해를 지필 수 있는 불씨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했다. 북한 금강송의 반입 여부를 논의하던 2009년 8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북한은 조문단(김기남 노동당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원동연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실장 등)을 서울로 보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예정에 없던 사안이었다. 정보사 공작장교로서 조문단 활동을 주시하는 위치에 있던 정규필의 설명이다.
MB 면담은 원래 계획이 없었고, MB도 별로 뜻이 없었다. 그러나 북측은 MB 면담을 들어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이때 MB의 측근이던 임태희 노동부 장관이 MB를 설득해 접견이 성사됐다. 이 자리에서 “남북관계를 잘 가져가고 싶다”는 김정일의 구두 메시지가 전달했다. 이를 계기로 그해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임태희-김양건의 싱가포르 비밀 회동으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