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타협 없이 대립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은 좌우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하던 해방정국 풍경과 닮았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5)입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인물 중심으로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를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봅니다. 제 1부 '이승만과 김구'편 제 1화를 무료로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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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의 연재글을 중앙북스에서 단행본으로 엮었습니다. 서점과 인터넷에서도『해방정국의 풍경-인물로 돌아보는 대한민국 현대사』(중앙books)를 만나보시죠.
제 1부 목차
① 여인과의 만남은 박복했다…출신 다른 이승만·김구 공통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303
② 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987
③ 좌우 대립의 ‘불편한 진실’…右는 우익, 左는 좌익 죽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731
④ 가슴 따른 자, 머리 못 이긴다…김구와 이승만 ‘정해진 운명’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2924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1화 미리보기
〈제1부〉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
」① 은원(恩怨)의 30년
」삶에서 운명이 차지하는 힘
1980년대 초, 나는 마키아벨리를 강의하면서 교재가 마땅치 않아 아예 『군주론』의 원문으로 가르치다가 이럭저럭 초고를 정리해서 번역·주석해 출판했다. 애초 의도는 강의용이었지만, 내용에 감동하는 바도 있고, 기존 번역판도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전하에게 상소하는 글 가운데 “위대한 궁수는 과녁보다 조금 높게 겨냥해 시위를 당깁니다”라는 말에 나는 깊이 감동했고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에 빠지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에게 충언하면서 “전하께서 오늘의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는데, 첫째는 타고난 운명(fortune)이고, 둘째는 전하가 이제까지 남긴 덕망(virtue)이고, 셋째는 역사가 부르는 순간(calling)에 전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라는 대목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역사학자 토인비(A J Toynbee)는 이 세 가지를 합쳐 업장(業障·karma)이라는 용어를 썼다.
너무도 다른 운명
이승만(1875~1965)과 김구(1876~1949)를 논의하는 글머리에 이 대목을 소개하는 것은, 두 사람의 일생도 마키아벨리의 이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끝내 유교적 권위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은연중에 공·사석에서 “과인(寡人)…”이라는 말을 썼고(손세일),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 하는 연설을 나도 들었다.
그와는 달리 역신(逆臣)인 김자점의 후손인 김구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열등감으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만한 항일투쟁을 쌓고 이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명망을 얻은 그가 상해 임시정부(임정)를 찾아가 경비원을 자청한 것이라든가, 임정 주석으로 추대되었을 때 그를 사양한 것은 그의 미덕이려니와, 이승만이 임정 초대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을 때,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의 직함을 대통령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한 것과는 다르다.
김구는 그 겸손을 평생 간직했으나, 그는 귀국하자 국내 정치인 김성수·송진우·조병옥·백관수·김준연·허정·장택상이 경교장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엄동설한에 3시간을 문밖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 들어오자 앉아서 큰절을 받은 것(장택상 ‘창랑유고’)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변모시키나를 잘 보여주며, 김구의 겸손은 여기까지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아마도 위와 같은 행태는 그들의 교육 경력과도 연결되었을 것이다.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우고 미국에 건너가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미국의 엘리트도 밟기 어려운 영재 코스를 밟았으며, 이것이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김구는 그렇지 못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것이 전부였던 김구는 미국의 최고 명문 출신인 이승만 앞에서 주눅이 들었으며, 해방정국에서 자신은 제2 바이올리니스트로 머물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게 했으나, 그가 아무리 겸손하고 동양의 미덕에 익숙했다 하더라도 한 살 많은 ‘형님(이승만)’을 만날 때마다 그리 마음이 상쾌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심성과 처신에는 그의 종교적 신심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승만은 삶을 마칠 때까지 자기 삶이 기독교 장로로서 떳떳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거쳐 하와이 한인교회와 필라델피아에서의 삶은 그를 기독교의 생활양식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의 공간에서는 기독교적 삶이 유익했다. 이러한 기독교의 정신은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그의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김구의 종교적 편력을 이해하는 데는 본인에 못지않게 그의 연구자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그는 화서(華西) 이항로의 문하인 고능선에게 유학을 배웠다. 성장기의 교육적 오리엔테이션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다. 이어서 그는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전쟁에도 참여했다. 안중근 집안과 교류하면서 천주학에도 잠시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가 일본 낭인 쓰치다(土田讓亮) 척살 사건 이후에는 몸을 숨기고자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사미계까지 받았으며, 주승(主僧)으로부터 많은 유산 상속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을 살았다.
종교적 방황을 겪던 김구는 승동교회를 다녔고, 다시 며느리 안미생(안중근의 조카딸)과 주치의인 성모병원 박병래 박사의 영향으로 천주교도 가까이했다. 그는 만년에 서대문교회에서 삶을 마감했으나 그의 뜻과 관계없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천주교의 대세(代洗)를 받고 눈을 감았다. 아내의 세례명이 줄리아(遵禮)였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와 같은 종교적 편력은 보는 이에 따라 방황일 수도 있고, 그의 개방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좋게 말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는 종교에 정착하지 못한 보헤미안이자 아노미적인 인물이었다.
여인과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이승만이나 김구는 모두 박복한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1890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가 정해준 대로 박씨녀(朴氏女)와 결혼했다. 그 시대 대부분의 결혼이 그랬듯이 애정이니 낭만이니 하는 것은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태산(泰山)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가 1905년에 민영환을 따라 미국으로 떠날 때 그의 아들을 데리고 간 것으로 보면 아예 미국에 정착하기로 작심하고 떠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식을 데려가면서 왜 아내를 두고 갔을까? 그는 기독교의 표피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기처(棄妻, 아내를 버림)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내 박씨는 수절하다가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납치되었다.
이승만은 1933년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혼녀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재혼했다. 그는 당시 영어통역사였다. 이승만이 58세요, 프란체스카가 33세 때였다. 우리는 그 여인을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의 우극(寓劇)이었다. 김용옥이 어느 글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용어로 프란체스카를 험담했다. 이는 이승만이 친일파이든 독재자이든 관계없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한 나는 형법 308조의 사자명예훼손죄에 따른 고소를 기념사업회와 함께 논의했으나 공소시효 3년이 지나 수포가 되었다.
김구는 네 번 파혼 끝에 결혼했으니 그 또한 기구했다. 처음에는 안중근의 누이와 혼담이 오갔으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의 반대로 혼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뒤 김구는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사랑하며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안창호는 그들의 결혼을 반대해 동생을 양주삼 목사에게 시집보냈다. 『백범일지』에 그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왜 두 가문에서 김구와의 혼인을 반대했는지를 말하기는 불편하다.
모택동이 당대의 지식인이자 스승인 양창제의 딸 양개혜를 사랑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둘이 고향을 버렸고, 마르크스가 자기를 아껴주던 이웃의 백작 베스트팔렌의 딸 예니를 사랑했으나 그 또한 장인의 반대로 사랑이 이뤄질 수 없자 야반도주했던 것과 꼭 같이, 김구도 처가의 반대로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야반도주하지는 않았다. 그 두 집안은 왜 김구를 사위로 맞지 않았을까? 양창제나 베스트팔렌의 경우처럼, “저 젊은이가 장래 유망한 청년이기는 하지만 내 사위는 아니다”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의 젊은 날의 만남을 정리하자면, 처음에 마키아벨리가 말한 운명일 수도 있고,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인연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불행한 관계가 그들만의 일로 끝나지 않고 30년 뒤에 민족의 비극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더 아프다.
[참고문헌]
굴원(屈原), 『이소(離騷)』
김구,『백범일지』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일조각, 1997)
마키아벨리, 『군주론』(을유문화사, 신복룡 옮김, 2019)
장택상, ‘창랑유고(滄浪遺稿)’, 『상록의 자유혼』(영남대, 1973)
🔎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한 정치학자. 건국대 교수(석좌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정치사』 『전봉준 평전』 『한국분단사 연구: 1943~1953』 『한국정치사상사』 『잘못 배운 한국사』 등을 지었으며, 『군주론』 『한말외국인기록』(전 23권) 『삼국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을 번역했다. 2023년부터 매주 한 차례 중앙일보에 ‘신복룡의 신영웅전’을 연재하고 있다.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목차
① 여인과의 만남은 박복했다…출신 다른 이승만·김구 공통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303
② 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987
③ 좌우 대립의 ‘불편한 진실’…右는 우익, 左는 좌익 죽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731
④ 가슴 따른 자, 머리 못 이긴다…김구와 이승만 ‘정해진 운명’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2924
〈제 2부〉 여운형과 김규식의 만남과 헤어짐
① 임정과 밀정, 그리고 여운형…김구 측근은 권총 빼들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4524
② “대물 여운형” 점찍은 美군정, 병약남 김규식에 눈 돌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6200
③ 미국은 양다리를 못 참았다, 중도파 고집한 여운형 최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7586
④ ‘좌우합작’ 허구의 희생자들…중도파, 비극적 해프닝 맞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8952
〈제 3부〉 송진우와 장덕수,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① 송진우의 ‘찬탁론’ 와전됐다, 기어이 총을 쏜 광기의 시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0770
② 누가 장덕수를 암살했나…이승만·김구 그때 갈라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2422
〈제 4부〉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 평양서 김구 맞이한 첫사랑…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116
② 아버지는 자결, 조부는 친일…北 택한 홍명희 ‘기구한 3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569
③ 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이념 논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15
④ 北이 꾸민 가장 기만적 모임…‘남북협상’ 비극으로 끝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8833
〈제 5부〉박헌영,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① 박헌영, 이 가혹한 호적등본…생모는 첩, 직업 주막업 기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0650
② 남편 동지의 아이 가졌다…박헌영 아내의 ‘접촉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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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스탈린은 박헌영 의심했다…모스크바 면접장서 생긴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860
④ '운명의 여인’ 현앨리스 재회…박헌영 죽음의 빌미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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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부〉해방정국의 3대 비극
①항쟁이냐 공산폭동이냐…1946년 '대구 사건'의 진실(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7163
(연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