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전두환과 미국, 그리고 김대중
」4회 6·29 선언 ‘1등 공신’ 레이건 대통령
」6·29 민주화 선언을 자신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다. 1987년 6월 29일 민주화 선언 당시엔 누구나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결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전두환의 기록담당 비서관이 ‘6·29는 전두환 대통령의 결단인데, 대선에 이기기 위해 노태우 후보에게 공을 돌렸다’고 폭로하는 글을 월간지에 기고했다.
이로써 6·29 원작자가 전두환이란 사실은 분명해졌다. 다음은 ‘누가 전두환이 6·29를 결심하게 만들었나’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5공 막판 철권통치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려는 전두환을 설득한 공신도 적지 않다. 그러나 결정적인 설득자는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87년 6월, 가장 먼저 움직인 CIA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는 1980년 봄 시위보다 규모도 컸고 더 조직적이었다. 80년 시위가 대학생 중심이었다면 87년 시위엔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80년 시위는 아마추어 학생회장들이 이끌었다면, 87년 시위는 프로페스널 재야단체가 이끌었다.
재야 민주화 세력은 1980년 당시 ‘서울역 회군’과 같은 중도 자진해산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적극 개입했다. 6월 10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확정되는 날 벌어진 항의시위 참가자들이 해산하지 않고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철야 농성을 시작했다.
당시 시위대를 앞장서 보호한 사람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철야농성 이틀째인 12일 밤 천주교 신자인 이상연 안기부 차장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왔다. ‘시위대를 성당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경우 경찰을 투입해 강제연행하겠다’고 통보했다. 추기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신을 보낸 사람에게 가 내 말을 한 자도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해 주시오. 공권력이 투입되면 내가 맨 앞에 누울 테니 나를 밟고 넘어가시오. 그 다음 사제들이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엔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들을 모두 밟고 넘어가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공권력 투입은 없었다. 추기경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추기경보다 한발 앞서 움직인 사람이 있다. 미국 CIA 한국지부장 존 스타인이다. 스타인은 1981년 레이건 정부 출범 당시 CIA 부국장(공작담당)으로 임명돼 해외공작 활동을 대폭 강화한 거물 스파이다. 비밀공작 책임자인지라 그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86년 10월 그가 한국지부장으로 부임한 것은 이례적이었다(재미 정치학자 이채진 저 ‘Reagan Faces Korea, Alliance Politics and Quiet Diplomacy’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