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해방정국의 3대 비극
」②1946년 대구 사건(하)
」“쌀을 달라!” 시민들의 외침
1946년 9월 30일 대구는 여러 곳에서 운동회를 끝마친 학생들이 시위 행렬을 벌이다 경찰의 제지를 당해 사소한 충돌이 있던 터라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태였다. 아직 추석(9월 10일) 분위기도 사라지지 않았다. 집회를 끝마친 뒤 노동자들이 학생 및 시민들과 합류해 1000여 명이 시위 행렬을 개시하자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중은 불어나 3000~4000명이 되었는데, 연령은 12~17세로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군중은 질서를 지키고 있었고 대부분은 호기심에 차 있었다. 정치적 색깔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 정도의 대치 상황은 당시로선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시위대를 다루면서 매우 거칠어 시민들 사이에 증오감이 일어났다.
대구 역전에 모인 노동자·지식인·학생·사무원·일반 시민들은 “쌀을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이 느닷없이 쌀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일부 남로당원들이 동사무소 앞에 나오면 쌀을 줄 것이라고 말해 민중을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위의 배후에는 경상북도 인민위원장 이상훈과 인민보안대장 나윤출(羅允出)이 있었다.
나윤출은 본디 대구 출신의 씨름장사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그는 그 뒤 대구를 탈출,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임돼 체육계에서 활약했으며, 1966년 런던 월드컵의 임원으로 참가했다가 숙청되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청년행동대원 100~200명씩 1개 분단을 이루어 대구 역전 광장과 주요 거리에 배치되어 암약하고 있었다.
10월 2일 아침이 되자 몇십 명의 시위대가 경찰이 죽인 피살자라며 사체를 들것에 싣고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 이를 목격한 군중심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격분해 있었다.(조선일보 1946. 10. 8.) 사망자의 신원에 대해 좌익과 우익의 견해가 다르다. 당시 남로당원으로 전평 경상북도평의회 간사였던 이일재(李一宰)는 나와의 인터뷰(대구 그랜드호텔 : 2003. 10. 1)에서 당시 사망자는 대팔(大八)연탄공장의 공원이었던 황팔용으로, 경찰의 발포로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대구 MBC가 제작해 1996년 10월 10일 방영한 ‘대구 10·1사건 50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했던 당시 대구의전 교수인 김계철과 경찰 관계자들은 좌익들이 대구의전 영안실에서 그 시체를 탈취해 아카징키(머큐롬)를 발라 시위했다고 증언했다. 그 시체의 이름이 황팔용이었다는 이일재의 증언이 맞을 수는 있지만 시체의 신원에 대해 나는 대구의전 교수들의 증언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