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치 손 떼겠다’ 망명 각서…美 “全 압력 아닌 이희호 약속”

  • 카드 발행 일시2024.08.06

제4부 전두환과 미국, 그리고 김대중

3회 ‘김대중 살리기 2탄’ 미국 망명

1982년 12월 중순 전두환 대통령이 신군부 주요 인사들을 청와대로 소집했다. 노태우 내무장관, 황영시 육군 참모총장, 정호용 3군 사령관, 박준병 보안사령관 등.

전두환은 ‘국정 운영에 있어 긴급히 결정할 중대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전두환은 좌중을 둘러본 다음 ‘김대중을 석방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단호한 어투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이 잠시 흐른 다음 전두환은 ‘자, 그렇게들 아시고 다들 바쁠 텐데 돌아가 일 보시오’라며 자리를 떠버렸다.

긴급 모임은 1분 만에 끝났다. 전두환은 훗날 사석에서 ‘혼자 결정했다’고 말했다. 신군부 핵심들 대부분이 반대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고 한꺼번에 불러 통보했다는 것이다. 실세 중 실세 허화평 정무수석은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며칠 뒤인 12월 20일 허화평은 정무수석에서 물러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김대중 ‘정치 안하겠다’ 각서 쓰고 미국 망명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청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독서하는 모습. [중앙포토]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청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독서하는 모습. [중앙포토]

김대중 미국 망명의 책임자는 민간인 출신 노신영 안기부장이었다. 노신영은 1982년 말까지 김대중을 미국에 보낸다는 계획을 가지고 12월 11일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이희호가 남긴 증언.

‘노신영 안기부장이 연락을 해왔다. 자신이 안기부장으로 있는 동안 김대중씨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서 남편에게 미국 가서 2~3년 병 치료 받으라고 권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청주교도소에 내려가 남편 면회해 응답을 알려주면 대통령(전두환)에게 건의해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겠다고 했다.’

이희호는 ‘이참에 남편의 지병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틀 뒤 교도소로 찾아갔다. 김대중은 1980년 5월 17일 체포돼 내란음모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1981년 1월 23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82년 3월 3일 다시 20년형으로 감형 받아 청주교도소에서 2년7개월째 복역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