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시험하는 거대 야당
입법권을 쥔 국회가 법안 형태로 사실상 정부 권한인 예산편성권을 대리 행사할 수 있을까. 탄핵소추안으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공무원 임면권을 어느 정도까지 제한할 수 있을까.
더불어민주당 등 거야(巨野)는 그간 입법권의 한계를 시험해왔다. 2일엔 새로이 이 같은 헌법적 질문(constitutional question)을 던졌다.
국회는 예산을 심의·확정한다. 하지만 편성권은 정부에 있다. 정부의 동의 없이 국회가 증액은 물론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 그러나 이날 법안으로 예산 지출을 강제했다. 바로 더불어민주당 등의 단독 표결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민생위기극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이다. 이 법안이 상정된 1일부터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나섰던 국민의힘 의원들은 강행 처리에 반발하며 표결 전 모두 퇴장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국민 한 명당 25만~35만원의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을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지난 총선 때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내건 대표 공약이었다. 이 전 대표는 22대 국회 개원 직후 1호 법안으로 이를 발의했고, 민주당은 속도전을 펼쳤다. 여당은 “최소 13조원의 국민 혈세를 강제하는 초헌법적 법안”이라고 반발했으나 거야의 힘에 밀렸다.
이날 통과된 법안에 따르면 정부와 지자체는 시행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지원금을 지급해야 한다. 학계와 정치권에서는 “입법부가 행정부의 예산 편성권을 침해하는 위헌성이 있다”고 본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입법 공청회에서 “정부의 핵심 권한 중의 하나인 재정권을 사실상 국회가 행사하게 된다는 점에서 헌법상 삼권분립에 위배될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최재성 전 의원도 2일 CBS라디오에 나와 “예산 편성권은 정부에 있다”며 “이것이 입법 사안이냐에 대해 민주당 내부의 청와대 출신 의원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표결에서 퇴장한 국민의힘은 ‘13조 현금살포법’이라며 반대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곽규택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나라 살림과 미래 세대에 대한 부담은 안중에도 없이 현금을 살포해 지지율을 끌어올리겠다는 ‘매표’ 행위에 불과하다”며 “거대 야당의 무책임함, ‘먹사니즘’이 아닌 ‘막사니즘’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올해 세수 결손이 예고된 상황에서, 13조~18조원으로 추산되는 지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점도 논란이다.
25만원 지원법, 추경도 필요해 논란…여 “13조 현금살포법”
국회예산정책처는 25만원 지원법의 소요 비용을 추계한 결과 “최소 12조8193억원에서 최대 17조9470억원이 든다”고 계산했다.
효과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지난달 18일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에 참석한 고기동 행정안전부 차관은 “2020년 긴급재난지원금도 지급한 돈의 30% 정도만 소비로 이어졌을 것으로 본다. (이 법안에 투입될) 13조원을 쓴다면 실제 소비로 이어지는 것은 3조원 정도”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13조원 중 3조원만 쓰여도 경제에는 도움되는 것 아니냐”(양부남 의원)는 논리를 댔다.
대통령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며 거부권 행사를 예고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만나 “13조 원의 재원이 소요되지만, 재원에 비해 효과가 크지 않다”며 “법률을 통해 행정부의 예산을 강제하는 것은 헌법상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나는 위헌”이라고 말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도 이날 합동브리핑을 통해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하며, 그간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다시금 말씀드린다. 법률안이 이송되면 재의요구를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거야는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을 통과시킨 직후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소추안도 본회의에서 의결했다. 지난달 31일 임명된 이 위원장은 3일 만에 업무가 중단됐다.
야권은 이 위원장이 임명 당일인 지난달 31일 김태규 부위원장과 함께 ‘2인 체제’로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와 KBS의 이사진을 임명한 것을 탄핵 사유로 들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여당 간사인 최형두 의원은 “민주당은 취임한 지 하루밖에 안 되는 방통위원장도 탄핵하겠다고 한다”며 “명백한 무고 탄핵이고 원인무효 탄핵”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정헌 민주당 의원은 “미리 짜인 한 편의 각본처럼 위법한 일들이 이틀 동안 전광석화처럼 이어졌다”며 “언론장악을 밀어붙인 그에게 헌법 가치 파괴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장관급을 탄핵 소추한 건 2023년 2월 이상민 장관 이후 두 번째다. 당시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물었다. 헌법재판소는 그러나 탄핵심판에서 만장일치로 “법 위반 행위가 중대하여 파면을 정당화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 결정을 했다. 헌재는 이번에도 이 위원장 체제의 의결이 중대한 법 위반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이 위원장은 탄핵안 의결 후 입장문을 통해 사퇴 없이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2023년 11월 이후 방통위원장과 부위원장에 대한 세 차례의 탄핵 시도와 세 번의 자진 사퇴가 있었다”며 “저는 방통위원장으로서 거대 야당의 탄핵소추라는 횡포에 당당히 맞서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탄핵소추의 부당함은 탄핵심판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전임인 이동관·김홍일 전 위원장은 탄핵안 의결 전 사퇴했다.
정혜전 대통령실 대변인도 “반헌법적·반법률적 무도한 탄핵 행태”라며 “북한이 오물 풍선을 보내는 것과 야당이 오물 탄핵을 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묻고 싶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야당의 횡포는 윤석열 정부의 발목잡기를 넘어서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것”이라며 “헌정 파괴 정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방문진 이사진 선임을 완료했으니, 전임자들처럼 업무 공백을 우려해 먼저 사퇴할 이유가 없다”며 “취임한 지 하루 만에 나온 탄핵소추안이 헌재에서 인용될 가능성도 작다”고 말했다.
야권은 방문진 이사진 선임 자체를 막을 현실적 카드가 마땅치 않지만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단 2인 체제로 공영방송 임원을 선임한 것에 대해 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6일에는 방통위 현장검증에 나서고, 9일엔 과방위를 열어 ‘방송장악 의혹’ 관련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방문진 이사진의 임기가 시작되는 12일 전후로 국정조사를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국민의힘은 민주당 소속인 최민희 과방위원장에 대한 제명촉구 결의안으로 응수했다. 최근 최 위원장이 탈북민 출신 박충권 의원에게 “전체주의 국가에서 생활하시다 보니”라고 말하고, 이 방통위원장에게 “뇌 구조가 이상하다”고 발언한 것이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노란봉투법도 상정=거야는 이날 본회의에 ‘노란봉투법’(노동조합·노동관계조정법)도 상정했다. 하도급 노동자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고 쟁의행위 범위를 확대하는 동시에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도록 한 것이 골자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민주당 주도로 처리됐고, 윤 대통령의 재의 요구로 재표결에 부쳐졌다가 부결된 걸 다시 처리하려는 것이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이 법안에 대해 “노동 투쟁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너무 과도해 노조나 개인을 파산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면서도 “노란봉투법은 헌법·민법과 충돌하는 점이 있고, 계약과 관련된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책임을 묻는 내용이 많다”고 반대했다.
국민의힘은 다시 노란봉투법이 상정되자 필리버스터에 돌입했다. 25만원 지원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에 이은 것으로 7월 임시국회 회기가 종료되는 4일 0시를 기해 자동 종결된다. 민주당은 8월 임시국회가 소집되는 대로 첫 회의에서 법안을 처리한다는 입장이다.
앞서 25만원 지원법 필리버스터에선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이 15시간50분간 발언을 하며 역대 가장 긴 필리버스터 주자로 기록됐다. 박 의원은 “13조원의 현금을 살포해 경기를 살리겠다는 것은 참으로 담대한 오류”라며 “세금으로 소득 소비를 높여 다시 세금을 걷으면 하향 평준화에 빠진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