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억지로 깎으려다/때로는/내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이해인 수녀의 시(詩) ‘연필을 깎으며’다. 수녀로서 조건 없는 헌신을 깨쳐가던 수련기를 지나 ‘오랜만에/연필을 깎으며/행복했다’고 말하는 시다. 박석영 감독의 5번째 장편 ‘샤인’(31일 개봉·사진)은 이 시의 마음에서 출발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의 배우 박명훈을 발굴한 영화 ‘재꽃’이 박석영의 작품. 그는 ‘들꽃’ ‘스틸 플라워’ 등 꽃 3부작으로 알려졌다. 시인이 시를 쓰듯, 바람처럼 불어온 세상을 자기 식대로 걸러내, 길가에 외롭게 핀 들꽃 같은 인물들의 삶으로 빚어내는 감독이랄까.
‘샤인’은 전에 없이 밝아졌다. 할머니를 여읜 제주 소녀 예선(장해금)이 엄마에게 버려진 6살 새별(송지온)을 보살핀다. 동네 수녀님, 치매 노인, 친구들도 돕는다. 버려지고 늙고 홀로 된 사람들뿐인데도, 미약한 빛이 연결되고 연결돼 따뜻한 마음의 고리를 만들어낸다.
처음 박 감독은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지켜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 사각지대를 그리고자 했단다. 신묘한 인연들이 작품을 바꿔놨다.
바닷가 등불 같은 집을 동료 감독 소개로 찾고 보니, 제주 4·3사건을 아프게 겪은 마을 유가족 댁. 제주서 12년을 살아 훤하다며 촬영 도우미를 자처한 박 감독의 지인은 세월호 희생자 아버지이자 다큐 ‘바람의 세월’ 감독 문종택씨였다. 묵직한 상처가 모인 현장이 외려 해사해진 건 연기 초짜 제주 아이(송지온)를 캐스팅 하면서다. 유달리 밝은 아이와 현지 주민들, 제작진이 식구처럼 지내다 보니 웃음이 전염돼 버렸다.
시나리오에 있던 처참한 갈등을 덜고, 깎아내며 영화는 깊어졌다. “매일 촬영하며 처음 보는 것을 목격하는 듯했다”는 감독의 기분은 보는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꽃처럼 문득 피어난 아이가 영화 안팎의 어른들을 구해낸다. 흥행 대전이 벌어진 여름 극장가에 모처럼 들꽃 같은 영화가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