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2>

네덜란드와 영국,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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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영국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 EIC)는 1600년 12월에 설립되었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는 1602년 3월에 설립되었다. 먼저 세워진 EIC를 형뻘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VOC가 오랫동안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출자금 규모부터 열 배의 차이가 있었다.

17세기 내내 VOC를 앞세운 네덜란드가 여러 해역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패권을 무너트려 나갔고 영국이 그 뒤를 따랐다. 인도양 일대와 동남아 해역을 호령하던 포르투갈의 해상제국은 17세기 말에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이 과정을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1598-1663)이라 한다. “향료전쟁”이란 별명이 이 전쟁의 초점을 보여준다.

근대국가의 선두주자 네덜란드

무슨 전쟁을 65년씩이나 계속하나? 이 전쟁과 뒤얽혀 나란히 진행된 80년전쟁(1566-1648, “네덜란드 독립전쟁”이라고도 함)은 더 길었다. 전쟁 중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았다. 역시 이 시기에 진행된 30년전쟁(1618-1648)을 마무리한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비로소 유럽에 근대적 ‘국제관계’의 개념이 세워졌다.

독립 전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관계는 근대적 국제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 중세 유럽에는 ‘국가’ 대신 ‘영지’가 있었다. 군주의 결혼에 지참금처럼 오가고 상속을 임의로 하다 보니 한 군주의 영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일이 많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지만, 지금의 베네룩스 일대는 당시 스페인 국왕의 영지였다.

산업 발달에 따라 중세 질서가 해체되고 근대국가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가 그 선두주자였다. 네덜란드 지역은 15-16세기에 산업 발전과 인구 증가가 빠른 곳이었다. 방조제와 풍차를 이용한 농지 확장이 진행되었고, 북유럽 일대의 천연자원을 모아 상업과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그 경제력이 정치적 독립을 위한 동력이 되었다.

풍차를 이용한 네덜란드의 간척사업은 15세기에 시작되었다. 18세기 말부터는 증기기관을 많이 썼다.

풍차를 이용한 네덜란드의 간척사업은 15세기에 시작되었다. 18세기 말부터는 증기기관을 많이 썼다.

네덜란드의 간척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국토의 26%) 청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간척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국토의 26%) 청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네덜란드 간척지 한 곳의 위성사진.

네덜란드 간척지 한 곳의 위성사진.

스페인에 대한 ‘반란’ 범위가 1579년까지 북부 지역으로(위트레흐트동맹) 확정된 후 독립을 선포하고(1581) 공화국을 수립했다(1588). 1588-1598년의 10년간이 진짜 ‘전쟁’ 기간이었고, 그 후로는 적대관계가 관성적으로 계속되었을 뿐이다. 스페인과 왕조통합을 이룬 포르투갈과 그 시점에서 전쟁을 시작한 것은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서는 선언이었다.

독립전쟁 양상에서부터 스페인의 중세적 힘싸움과 네덜란드의 근대적 머리싸움이 엇갈렸다. 초기에 스페인군은 압도적 무력으로 전 지역을 석권했으나 민심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용병부대의 약탈과 잔혹행위를 억제하지 못하거나 안 했기 때문이다. 반면 독립세력은 이해관계의 유연하고 치밀한 조정을 통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단합을 유지했다.

독립전쟁은 네덜란드의 근대 지향성을 농축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유럽 서북부의 상공업 발전이 네덜란드 영역으로 집중되었다. 최대 도시였던 남부의 앤트워프를 대신해서 암스테르담이 상공업 중심지가 된 것이 한 예다. 앤트워프가 스페인 영역으로 남으면서 개신교도들을 쫓아내자 많은 상공업자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다.

17세기를 앞서간 네덜란드동인도회사

윌리엄 번스틴은 〈교역의 세계사: 멋진 주고받기〉(2009)에서 VOC의 EIC에 대한 우위를 요령있게 설명한다. 출자금 규모가 압도적이었을 뿐 아니라 선진적 경영 원리를 도입한 사실을 중시한다.

EIC의 출자는 한 차례 항해를 단위로 하는 1회성 출자인 데 반해 VOC의 출자는 항구적 출자였다는 차이를 지적한다. VOC가 법인체로서 지속적 사업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조건이다. 자카르타(바타비아)에 총독부를 설치해 현장 중심의 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 지속성 덕분이었다고 설명한다.

1681년경의 바타비아 시가도.

1681년경의 바타비아 시가도.

VOC 화폐. VOC는 화폐 주조, 조세 징수에서 군대 조직과 전쟁 선포까지 국가의 대부분 기능을 갖춘 회사였다.

VOC 화폐. VOC는 화폐 주조, 조세 징수에서 군대 조직과 전쟁 선포까지 국가의 대부분 기능을 갖춘 회사였다.

암스테르담의 VOC 본사.

암스테르담의 VOC 본사.

조직 규율의 차이도 번스틴은 지적한다. EIC 쪽은 회사 이익과 어긋나는 출자자들의 개별 사업이 잘 규제되지 않았는데 VOC는 17인 이사회(Heeren XVII)의 통제가 확고했다. 직원들이 개인적 이득을 추구하는 활동에 대해서도 통제력의 차이가 있었다. EIC가 VOC의 규율을 배우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다.

이 차이가 두 나라 금리 수준에도 반영되었다. 영국에서 연 금리가 10% 수준일 때 네덜란드에서는 4% 수준이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왕실부터 걸핏하면 빚을 깔아뭉개는 일이 종종 있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확고했다. 채권 회수가 확실한 네덜란드에서는 낮은 금리라도 사람들이 기꺼이 투자하고 금융시장이 활발했다.

VOC의 EIC에 대한 우세는 두 나라 경제력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1600년경 네덜란드 1인당 GDP가 (지금 돈) 2175달러 수준일 때 영국은 1440달러 수준이었다는 연구결과를 번스틴은 인용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1370달러와 1175달러 수준) 직물, 금속제품 등 거의 모든 제조업 분야에서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 최고 수준에 올라 있었다.

향료 시장의 독점, 차원이 달라졌다.

VOC 설립 후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향료 교역이었다. 반다 학살(Banda Massacre, 1621)이 그 대표적 조치였다. 얀 코엔 총독이 직전에 본사에 보낸 편지가 그 목적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다를 확실하게 굴복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데려다 살게 해야 합니다.” 1만5천여 명 주민을 토벌하는 데 2천여 명 병력이 동원되었다.

가장 큰 론토르섬에는 26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약 5천 명 주민이 살고 있었다. 높은 인구밀도는 생산활동의 전문화를 말해준다. 육두구 나무를 보살피고 수확해서 내다 파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고 식량은 외부에서 수입했다. 교역에 익숙해진 반다 상인들은 북쪽 말루쿠제도에서 나오는 정향까지 취급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포르투갈인은 향료제도 도착 후 백년 동안 현지민의 생산활동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항로를 통제하며 유통의 독점만을 노렸다. 이제 네덜란드인은 생산의 독점에 나섰다. 코엔 총독이 데려다 살게 하자는 “다른 사람들”이 누구였겠는가? 마데이라섬 등 대서양에 자리 잡고 있던 노예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그는 생각한 것이다.

VOC의 폭력은 원주민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1619년 협약을 맺어 VOC와 EIC가 교역기지를 공유하고 비용을 1 대 2로 분담하기로 했다. 현지의 VOC 요원들은 본국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협력관계를 파탄시키려 들었다. 그런 끝에 1623년 ‘암본 학살(Amboyna massacre)’이 일어났다.

발단은 VOC의 일본인 용병 하나가 기지를 탐색하다가 적발된 것인데, 네덜란드인을 쫓아내려는 음모를 영국인들과 함께 꾸몄다는 자백을 받았다. 확대된 수사(와 고문)의 결과 영국인 10명(EIC 대표 포함)이 9명의 일본인, 1명의 포르투갈인과 함께 반란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두 회사 사이 협력의 가능성을 뿌리 뽑은 일이었다.

‘향료 이후’ 시대를 바라보는 네덜란드와 영국

인도양이 유럽인에게 열린 대항해시대 초기에 최대의 상품은 향료(후추 포함)였다. 16세기를 통해 포르투갈은 향료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며 향료 시장을 탈취한 네덜란드는 두 개 측면에서 이득을 더욱 늘렸다.

하나는 독점의 강화였다. 유통의 독점만을 노린 포르투갈과 달리 VOC는 생산 단계부터 독점을 확립하는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VOC는 생산량과 반입량을 임의로 조정함으로써 유럽의 향료 가격을 통제할 수 있었다. 공급을 줄이기 위해 생산지의 숲을 수시로 훼손하기도 하고 심지어 유럽까지 실어온 향료를 태워버리기도 했다.

또 하나 측면은 산업 다각화였다. 네덜란드 제조업의 발달에는 향료와 바꿀 공산품의 수요가 큰 몫을 맡았다. 포르투갈이 교역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교역과정의 말단에서 떡고물만 받아먹던 네덜란드가 이제 독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득의 상당 부분을 배후지로 흘리던 포르투갈과 달리 네덜란드의 교역 이득은 제조업 등 국내 관련 분야에서 재활용되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이치는 향료 경우도 마찬가지일까. 장거리 교역에서 향료의 비중은 차츰 줄어들었다. VOC가 유럽으로 보낸 화물 중 향료의 비중이 1650년경 68%에서 1700년경 23%로 떨어진 사실을 앤서니 리드는 〈통상시대의 동남아시아〉에서 지적했다.(1권 288쪽) 유럽의 사회적-문화적 변화로 향료 수요가 줄어든 결과였다.

VOC 역시 상황 변화에 따라 다른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EIC와의 경쟁에는 향료 사업의 효율성에 집중한 회사 체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VOC의 활동이 자카르타의 총독부를 중심으로 지금의 인도네시아 영역에 묶여 있는 동안 EIC는 인도와 중동 등 여러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