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업계 걸림돌 된 ‘물’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 탄탄대로’ 앞에 ‘물 부족’이라는 암초가 나타났다. 용수·전력 확보 문제가 세계 반도체 제조를 도맡은 한국·대만의 난제이자 새로운 승부처로 부각되면서 SK하이닉스도 공공 하수처리장의 물을 가져다 정화해 사용하는 등 해법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대만 TSMC의 상황은 더 심각해 연초 미국 씽크탱크 제임스타운이 “TSMC가 일본 구마모토에 반도체 공장을 지은 이유 중에 대만의 물·전력 부족도 있다”라고 분석했을 정도다.
24일 SK하이닉스가 공시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 2024’에 따르면 HBM 대형 생산기지를 건설 중인 충북 청주 사업장의 물 스트레스 지수가 ‘고위험’으로 나타났다. 물 스트레스란 세계자원연구소(WRI)의 기준을 바탕으로 해당 지역의 물 부족 현상을 지수화한 것이다. 청주의 물 부족은 전년도에 ‘중간 위험’이었다가 1년 만에 ‘고위험’으로 높아졌다.
청주 M15X 팹은 인공지능(AI)용 메모리로 각광받는 HBM 등 D램 신규 생산기지로 SK하이닉스가 낙점한 곳이다. 회사는 내년 가동을 목표로 이곳에 5조3000억원을 투입해 공장을 짓고 있다. SK하이닉스의 HBM 물량이 내년 생산분까지 ‘완판’된 가운데, 청주 팹의 용수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HBM 사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물은 반도체 제조공정의 여러 단계에 사용되는 주요 자원이다. 예컨대 웨이퍼 세정에는 고도 정제된 초순수를 사용해야 한다. 앞서 SK하이닉스는 용인 팹 건설 과정에서 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착공이 지연되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향후 발생할 수도 있는 물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 국내 반도체 업계 최초로 외부 하수처리 재이용수를 도입했다. 반도체 공장에서 쓴 물을 재이용할 뿐 아니라, 하수처리장 등 외부 물을 가져다 정화해 쓴다는 얘기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청주시 공공 하수처리장에서 재이용수를 받아서 사용하며 반도체 공장 대기오염을 걸러주는 스크러버(필터) 등 필수 공정 이외의 인프라에 주로 사용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SK하이닉스가 강물 등 자연에서 가져온 물(취수)의 양은 1억655만톤으로, 전년 대비 5% 줄었다. 대신 재이용수 양은 5809만톤으로 18% 늘었다.
삼성전자도 반도체에 필요한 용수가 2030년 현재의 두 배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2030년 취수량 2021년 수준 유지’가 목표다. 반도체 공장을 늘려도 강물·지하수를 더 가져다 쓰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2년 환경부·경기도 등과 하수처리수 재이용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고 수원·용인·화성·평택·오산 등 지자체와 이를 위한 인프라 구축 등을 협의 중이다.
SK하이닉스의 재생 에너지 사용률은 30%로, 전년(29.6%)보다 소폭 증가했다. 회사는 “국내 재생에너지 조달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고 보고서에 적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처음으로 태양광 직접전력거래계약(PPA)을 SK에코플랜트와 맺었다.
물과 전력 확보는 동아시아 반도체 업계의 공통 난제다. 최근 발간된 S&P 글로벌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반도체 제조는 인구 750만이 사는 홍콩만큼 많은 물을 소비하고 있다. 보고서는 “물 관리를 잘못할 경우 2030년 반도체 생산량의 10%까지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