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있을 때 여자 귀신이 발목을 들어 올리고, 남자친구와 귀접(귀신과의 접촉)까지 해 괴롭다는 제보자. 그의 집을 찾은 무당은 휘파람으로 귀신을 소환하고는 “이승 사람 둘과 저승 사람 둘이 살고 있었다”며 굿을 제안한다. 이어지는 굿판. 제보자는 여자 귀신 목소리를 내며 “하기 싫다. 우리 너(무당)만 없으면 잘 지낼 수 있다”고 짜증을 냈고, 그런 여자친구의 모습에 “귀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던 남자친구가 돌변해 굿판에 뛰어든다.
티빙 오리지널 ‘샤먼: 귀신전’ #“귀신 믿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신들린 연애’ 등 오컬트 봇물
기독교 신자가 만든 무당 다큐
11일 공개된 티빙 다큐멘터리 ‘샤먼: 귀신전’(이하 '샤먼', 제작사 JTBC) 4화의 일부 내용이다. ‘샤먼’은 귀신 현상으로 고통받는 제보자 7인이 무속인 6명의 의식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밀착 취재했다. 배우 유지태와 옥자연이 프리젠터로 나섰고, 인류학 박사 로렐 켄달, 민속학 박사 이건욱, 문화심리학 박사 한민 등 10여 명의 연구자도 출연했다.
이 다큐에서 ‘귀신을 믿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귀신이 보여 괴로운 사람과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무속인이 있을 뿐이다. 귀신 형상도 제보자가 묘사한 그대로를 보여준다.
“귀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던 기독교 신자 유지태는 여러 기이한 현상을 접한 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깊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샤먼’은 오컬트(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 장르로 첫 천만 영화에 등극한 ‘파묘’(올 2월 개봉)보다 앞선 2022년 기획을 시작했고 지난해 10월 최종 완성본을 만들었다. 내부 사정으로 공개일이 밀리면서 ‘현실판 파묘’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낙수 효과를 보고 있다.
연출자인 JTBC 이민수 PD는 “오컬트는 마니아층에 소구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분이 봐주셔서 놀랐다”면서 “무속이 정치인·연예인·사업가 등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기복신앙이라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무당의 방송 출연이 많아진 이유
과거 마이너 장르로 취급받던 오컬트가 최근 콘텐트업계에서 각광받고 있다. SBS ‘신들린 연애’는 20~30대 점술가 남녀 8인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최근 '나는 솔로'(SBS Plus·ENA)를 넘어 연애 예능 화제성 지수 1위를 차지했다. 자신들의 연애 점사를 알면서도 이와 다르게 마음이 움직이는 모습이 관전 포인트다. '파묘'에 이어 오컬트를 소재로 한 영화 '핸섬 가이즈'(지난달 26일 개봉)도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지하실에 봉인됐던 흑염소 악귀가 풀려나는 설정의 이 영화는 오컬트와 코미디를 결합해 152만 관객(21일 현재)을 모았다.
앞서 5월 개봉한 예술영화 '악마와의 토크쇼'는 영매를 통해 악마를 불러내고, 악마숭배 집단을 등장시키는 등 오컬트 소재로 10만 관객을 모으며 장기흥행에 성공했다. 지난 14일 폐막한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된 영화 '신사: 악귀의 속삭임' 또한 오컬트 소재의 공포영화다. 주연을 맡은 김재중은 원치 않게 신의 부름을 받았지만 운명에 순응해 신당을 차린 미대 출신의 젠틀하고 세련된 무당 명진을 연기했다.
추리예능인 티빙 ‘크라임씬 리턴즈’와 넷플릭스 ‘미스터리 수사단’도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퀴즈를 설계하는 등 오컬트적 요소를 결합시켰다. 5년 넘게 방영 중인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서장훈·이수근 진행)에는 귀신을 본다는 고민 사연이 종종 등장하며, 무당이 된 개그우먼 김주연과 배우 정호근은 채널A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MBN ‘속풀이쇼 동치미’ 등에서 무속 관련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오컬트 콘텐트가 많아지는 건,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상의 반영”이라면서 "올드하고 무서운 이미지의 무속이 좀 더 대중적이고 젊은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오컬트 붐에 한 몫 하고 있다"고 봤다.
이어 "영화 ‘파묘’에서 세련된 젊은 무당의 등장은 한국 무속신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국 고유의 장르인 동시에 대중적 호기심이 큰 소재라 앞으로도 다양한 콘텐트로 다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타로·사주 카페가 넘쳐나고, 비대면 점술시장이 커지면서 무속이나 오컬트에 대한 젊은 층의 심리적 장벽이 낮아진 것도 오컬트 콘텐트가 양산되고 있는 배경으로 꼽힌다. ‘샤먼’의 오정요 작가는 “과거엔 ‘그래서 귀신이 있대?’라고 접근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근래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용한 무당 있으면 소개해줘’일 정도로, 무속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들 궁금해하는 분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