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제대 후 스물둘. 고향 충주를 떠나 상경했다. 가진 건 어깨너머로 배운 세탁 기술뿐. 강남 은마아파트, 여의도 삼부아파트 주변 세탁소에서 일을 배웠다. 눈이 뜨일 무렵 압구정 현대아파트 안 시장에 빈 가게가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12평 공간. 6평이 1칸인데, 두 가게를 튼 곳이었다. 월세도 부담이었지만 부자 동네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고민 끝에 ‘호랑이 굴에 가야 범을 잡는다’는 생각으로 1985년 세탁소를 열었다. 큰 호텔에서나 쓰던 3000만원짜리 수입산 세탁 기계를 빚을 내 들였다. 지금으로 치면 1억원가량의 거금. 일반 세탁소로선 파격이었다. 이 정도는 갖춰야 부촌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세련된 복장의 손님이 가게 문을 열었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 의상실에서 왔다고 했다. 의상실에 전시하던 흰색 투피스 여덟 벌. 실크 소재라 먼지가 잘 붙어 고객에게 건네기 전 드라이클리닝을 요청했다.
알고 보니 앙드레김 의상실이 근처 신사동에 있었다. 앙드레김 집도 현대아파트 11동. “오길 잘했네.” 쾌재를 불렀다.
강남 2024 6화
📌“잘 해봐” 맡긴 뒤 달라는 대로 준 이명박
📌미그기 넘어오자 쌀 동났다 ‘원조 사재기’
📌가방 찾아준 경비에 수표, 버린 책엔 달러
📌사라질 시장에서 도전장 낸 ‘압구정 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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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사가 벌어졌다. 세탁기에서 뺀 옷이 죄다 회색으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한 벌 값만 200만원. 여덟 벌이니 1600만원으로, 지금이라면 6000만원가량. 물어주려면 가게를 접어야 할 판이었다. 밤잠을 설치고 날이 밝자마자 앙드레김을 찾아갔다.
“제가 아직 경험이 없어 사고가 났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