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태준의 마음 읽기

은해사 우향각에서 마셨던 ‘엄마녹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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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제주는 연일 불볕더위이다. 장마가 이어지더니 요 며칠은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무슨 일인지 강풍도 잦다. 세게 부는 바람 탓에 돌담 아래 자라던 해바라기 줄기가 꺾이기도 했다. 날씨가 극성스러워 걱정이다.

내가 사는 마을 입구에는 넓은 수박밭이 있는데, 그제 아침에는 수박 수확을 하고 있었다. 수박밭 주인은 수박이 잘 익었는지를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아는지 바닥에 기는 덩굴을 끊어 큼직한 수박을 한 통씩 연신 들어 올렸다. 썸벅썸벅 잘라서 먹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옆집에서는 단호박을 땄다며 또 갖고 왔다. 아내는 뭔가를 챙겨 드리는데, 시골에서는 먹을 것이든 뭐든 주고받는 일이 쉼이 없이 계속된다. 그만큼 모두의 마음이 푸근하다.

딸 출가 날 어머니 심은 차나무
30년 지나 노모 직접 딴 차 보내
차 마시는 동안 마음 평화 얻어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볕이 강할 때나 비가 쏟아질 때는 손을 놓고 잠시 쉬어야 한다. 특히 여름비가 올 때나 저녁을 먹은 후에는 찻물을 끓여 차를 마시는데, 이런 시간에는 즐거움이 있다.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근래에 본 풍경이나 겪은 일을 다시 떠올려보기도 한다. 가령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는 대원사 생각도 했다. 얼마 전에 다녀온 대원사 가는 길은 참 호젓했다. 길게 이어진 벚나무길은 그늘이 시원했다. 한쪽으로는 강가에 하얀 모래톱이 보였고, 또 물풀이 자라고 있어서 내 어릴 적 보았던, 훼손되지 않은 물가의 풍경을 다시 만난 듯했다. 절의 연못에는 하얀 수련이 피어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으니 연못과 수련은 내게 고요한 시간을 갖고 안정된 마음을 지니며 살 것을 당부하는 것만 같았다.

명나라 때 허차서(許次緖)라는 이가 살았는데, 그는 차를 마시기에 좋은 때가 언제인가에 대한 문장을 남겼다. 그의 언급에 따르면 마음과 몸이 한가로울 때, 시를 쓰고 피곤할 때, 마음이 어수선할 때, 문을 닫고 밖의 일을 피할 때, 손님이 찾아 왔을 때, 조금 흐리고 보슬비가 내릴 때, 연못가 정자에서 더위를 피할 때, 고요히 향을 사를 때, 맑고 그윽한 절을 찾아갔을 때, 좋은 샘과 기이한 돌을 만났을 때 등을 차 마시기에 좋은 때로 예시했다.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최근에 절에서 차를 마셨던 일이 차의 향기처럼 은은하게 기억났다.

영천 은해사를 찾아갔을 때였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우향각(雨香閣)에 들러 은해사 주지 덕조 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스님께서는 차를 내주셨다. 그런데 차 이름이 ‘엄마녹차’였다. 스님께서는 차의 이름과 관련해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연을 들려주셨다. 이 차는 한 비구니 스님의 속가 어머니께서 선방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위해 절에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덕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이 스님이 되려고 출가를 했을 때 그 출가하는 날에 어머니는 차나무를 심었다고 해요. 뿌리를 잘 내리라고, 마음이 잘 커가길 바라며 차나무를 심었는데,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되었어요. 딸이 출가하여 수행자가 된 지도 삼십 년이 흘렀고, 차나무도 수령이 삼십 년이 되었지요. 이제 그 어머니는 팔순 노모가 되었는데, 해마다 그 차나무에서 찻잎을 직접 따고 덖어서 절에 보내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차 이름이 ‘엄마녹차’입니다.” 출가한 딸을 한시도 잊지 못해서, 아니 그보다는 딸이 훌륭한 수행자가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에서 세속에 사시는 어머니가 해마다 햇차를 정성껏 마련해 절에 공양물로 보내오신다는 말씀에 가슴이 뭉클했다. 스님은 내게 차를 더 권하면서 “이곳 이름이 우향각인데, 오늘 때마침 여름비가 오네요. 비의 향기가 잘 느껴지는지요. 녹음이 우거진 여름산이며 저 능선이며 골안개며 산새 소리가 이 빗속에, 빗소리 속에 들어있는 것이지요”라고 말씀하셨다. 차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감명 깊었지만, 차를 마시면서 들은 스님의 말씀도 꼭 선시(禪詩) 같았다.

중국의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는 ‘식후(食後)’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식사 후에 낮잠 한숨 자고/ 일어나 두 사발의 차를 마시네/ 머리 들어 해 그림자를 보니/ 벌써 서산으로 기울었네/ 즐거운 사람은 해 짧음을 애석해하나/ 근심 있는 사람은 해가 길어 지루하네/ 걱정도 즐거움도 없는 이는/ 길거나 짧거나 한평생을 맡기네”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마음에 한적함을 얻는다. 시비와 분별도 잠시 내려놓는다. 폭염도 폭우도 잠시 피하게 된다. 울분이 가라앉는 것을 보게도 된다. 비의 향기 속에 여름산이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내 마음을 그윽한 향기가 괸 찻잔 내려보듯 보게 된다. 마음이 삼십 년 자란 차나무처럼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지, 마음의 품이 차나무처럼 커졌는지 돌아보게 된다. 무덥고 비가 잦은 이 요란한 여름에는 은해사 우향각에서 마셨던 차 생각이 자주 날 것 같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