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늄 1위'인데 전력난…카자흐 첫 원전, 한국도 수주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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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불리는 카자흐스탄이 올 하반기 국민투표를 통해 원자력 발전소 도입 여부를 결정한다. 자원 대국임에도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는 카자흐스탄의 첫 원전 사업자로 선정되면, 원전이 없는 중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의 원전 개발에 참여할 가능성도 커진다. 중국·러시아·프랑스와 함께 한국도 카자흐스탄 원전 수주 후보로 선정돼 ‘원전 실크로드'를 위한 경쟁에 돌입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대통령궁에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대통령궁에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카자흐스탄은 2800㎿(메가와트) 규모의 신규 원전 2기의 도입을 준비 중이다. 2029년 착공, 2035년 완공이 목표다. 원전 1기당 50억 달러(약 7조원)가 소요돼, 2기를 건설에 14조원이 넘을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카자흐스탄 원전 합자회사의 대표인 티무르 잔티킨은 “원전 건설에는 최대 150억 달러가 투입될 것”이라며 “높은 안정성을 기준으로 수준 높은 가압경수로(PWR) 방식을 채택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2년 조기 대선에서 승리해 2029년까지 집권하는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라, 일관성 있게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원전 부지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인근 발하쉬 호수 서쪽의 작은 마을인 울켄으로 선정됐다.

우라늄 생산량 1위, 원전은 0…전력난 심각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른다면, 1990년대 카스피해 악타우 시에 있었던 소련 BN-350 원자로 해체 이후 카자흐스탄에 처음으로 원자력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카자흐스탄은 원전의 핵심 연료인 우라늄의 세계 생산량 1위 국가지만 지금껏 원전은 건설된 바 없다. 앞서 지난 2016년 초대 대통령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원전 사업 타당성을 검토했지만 국민 정서상 보류된 바 있다.

국민적 거부감은 ‘세미팔라틴스크의 비극’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이 소련의 일부였던 1949~89년, 소련 당국은 세미팔라틴스크에서 456건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 일대 300㎢가 방사능에 오염돼 '죽음의 땅'이 됐다. 주민들은 암·결핵·정신질환에 시달렸고 낙태와 기형아 출산 비율도 치솟았다.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 1991년 8월29일 세미팔라틴스크를 영구 폐쇄했다. 유엔이 지난 2009년 ‘국제 핵실험 반대의 날’을 8월29일로 지정한 것도 이 지역의 비극을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구소련의 주요 핵 실험 장소 중 하나였던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 시험장의 모습을 박물관에서 구현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구소련의 주요 핵 실험 장소 중 하나였던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 시험장의 모습을 박물관에서 구현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이런 상처에도 카자흐스탄 당국은 고질적인 에너지 부족을 해결하려면 원전 건설이 필수적이란 입장이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정부의 결단이 없다면 에너지 용량 부족이 2030년엔 6GW(기가와트)에 이르러 경제 성장의 둔화, 주택과 서비스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며 원전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원유 매장량 세계 12위, 천연가스 매장량 16위로 자원대국인 카자흐스탄의 에너지난을 두고 미국 외교 전문지 디플로맷은 ‘거대한 역설’이라고 표현한 적 있다. 2022~2023년 겨울 카자흐스탄의 전체 도시에 전력망이 차단돼 주민들이 고통에 시달렸다. 전력난의 가장 큰 원인은 송전 설비의 노후화다. 설비 대다수가 소련 시절인 1960~70년대 건설됐는데, 정전 원인의 80%가 노후된 설비 탓이라고 디플로맷은 전했다.

카자흐스탄 에키바스투즈 마을에 위치한 GRES-2 화력 발전소의 모습.

카자흐스탄 에키바스투즈 마을에 위치한 GRES-2 화력 발전소의 모습.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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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대한 높은 에너지 의존도, 암호화폐 채굴 증가(비트코인 채굴 전세계 3위)도 에너지 부족의 원인이다. 그린에너지 전환도 과제다. 206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한 카자흐스탄은 현재 전력의 80% 이상은 석탄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수력·풍력·태양광 발전은 전력 생산량이 미미한데다 불안정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자원 부국이지만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는 건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5국이 공통적으로 겪는 실정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중단 없는 에너지 공급이 이뤄지려면 2030년까지 연간 최소 330억 달러의 지출이 필요하다”고 추산한 바 있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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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 뛰어난 한국, 카자흐에 최적 선택지"

카자흐스탄이 지난해 8월 선정한 원전 건설 사업자 최종 후보는 한국의 한국수력원자력, 중국의 핵공업그룹(CNNC), 러시아 로사톰(Rosatom), 프랑스 EDF 등 총 4곳이다.

이들 원전 수출국들은 카자흐스탄을 중앙아시아 원전 실크로드를 열 '첫 단추'로 기대하며 수주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앞세워 카자흐스탄의 최대 교역국으로 떠오른 중국은 러시아·프랑스가 제안한 비용의 절반을 제시했다고 영국의 싱크탱크 NNWI는 전했다. 중앙아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러시아는 지난 5월 우즈베키스탄에 55㎿ 규모의 원자로 6기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아직 계약이 마무리되진 않은 상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프랑스는 국제 무대에서 동맹 다각화를 추구하며 러시아·중국 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카자흐스탄의 전략적 목표를 공략하고 있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오른쪽)이 지난해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회담에 참석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오른쪽)이 지난해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회담에 참석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국은 지난 13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방문,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을 통해 에너지 인프라 수주를 위한 협력을 포함한 37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원전 수주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상태다. 카자흐스탄 총영사를 역임한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러시아·중국·프랑스는 모두 카자흐스탄을 둘러싼 지정학의 게임체인저들로, 원전 사업자로 이들 중 한 나라를 선택하는 건 다른 나라를 자극해 파워게임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면서 “원전 기술력에서 앞서 있으면서 지정학 차원에서 '미들파워 국가'인 한국이 카자흐스탄에 가장 무해한 최적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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