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초저출생과 ‘셀 코리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아이를 갖는다는 건 20여년 전에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무렵 합계 출산율은 1명대 초중반을 맴돌고 있었다. 또래들 사이에선 취업과 내 집 장만 등을 묶어 “도무지 풀기 어려운 세 가지 난제”란 푸념이 나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앞서 가정을 꾸린 선배와 친지들은 “일단 저지르고 나면 어떻게든 수습된다”며 우리를 다독이곤 했다. 그 막연한 조언을 따라 하나, 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대출을 받아 집을 장만했다. 돌이켜 보면 무모해 보이는 결단을 하게 만든 건 “그래도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란 희망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경제는 성장할 것이고, 내 소득과 자산가치도 늘면서 빚 부담이 조금씩 줄 것이란 기대였다. 숱한 우여곡절과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지만 어쨌든 큰 궤도는 이 기대를 벗어나진 않았다.

그런데 크게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않던 합계 출산율은 2015년 1.24명을 찍은 이후 급락세를 보인다. 2016년 1.17, 2017년 1.05, 그리고 2018년에는 1명 선이 깨졌다. 올 들어선 급기야 0.6명대까지 하락했고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까지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진국 평균에도 못 미치던 출산율이 그나마 반 토막이 나버린 것이다. 2015년 이후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기에 그랬을까.

‘우상향의 기대’ 부재가 낳은
인구 비상사태와 증시 탈출 러시
개혁 통해 경제 역동성 되살려야

지난 5월 서울 시내 한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의 모습. 합계 출산율은 2015년 1.24명을 찍은 이후 2016년 1.17, 2017년 1.05, 그리고 2018년에는 1명 선이 깨졌다. 올해 0.6명대까지 하락하며 지난 19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인구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연합뉴스

지난 5월 서울 시내 한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의 모습. 합계 출산율은 2015년 1.24명을 찍은 이후 2016년 1.17, 2017년 1.05, 그리고 2018년에는 1명 선이 깨졌다. 올해 0.6명대까지 하락하며 지난 19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인구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연합뉴스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 중 출산율과 관련해 주로 많이 거론되는 건 여성 고용률과 집값이다. 2015년은 여성 고용률이 처음으로 50% 선을 넘긴 해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를 사회 제도와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해 그렇지 않아도 조마조마한 상황이었는데, 순간 한계치를 넘어 폭발해버린 것이다. 난제 수준을 넘어 젊은 부부들은 “아이냐, 일이냐” 양자택일의 궁지에 몰렸다. 이어 결정타를 날린 게 2017년 이후 집값 급등이다.

이번에 대책 마련을 주도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도 이 ‘2015년의 미스터리’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육아 휴직을 지금보다 부담 없이 쓰게 하고, 결혼·출산한 부부의 대출과 집 장만을 돕고, 일하는 부모를 위해 돌봄 공백을 줄이는 게 핵심 방안으로 제시됐으니 말이다. 그간의 백화점식 대책보다는 낫고, 출산율 하락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책만으로 정부가 공언한 추세적 ‘반전’까지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다. MZ세대는 스스로를 ‘부모보다 가난해질 첫 세대’라고 지칭한다. 삶의 고비고비를 넘어가게 만드는 힘인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기대 자체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19일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주제로 열린 2024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는 출산·육아휴가 미결재 시 자동 승인 간주, 단기 육아휴직, 돌봄휴가 시간 단위 사용, 공공임대주택 거주 중 출산하면 넓은 평수 이사 보장 등의 방안이 제시됐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지난 19일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주제로 열린 2024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는 출산·육아휴가 미결재 시 자동 승인 간주, 단기 육아휴직, 돌봄휴가 시간 단위 사용, 공공임대주택 거주 중 출산하면 넓은 평수 이사 보장 등의 방안이 제시됐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요즘 우리 증시다. 증시는 나라 경제의 현재는 물론 미래 전망까지 보여주는 창이다. 올해 들어 미국, 유럽, 일본, 대만까지 글로벌 증시가 전고점을 돌파하며 신기록을 써가는 와중에 우리 증시는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했다. 미국 S&P 500지수가 15%, 나스닥 지수가 18% 급등한 사이 코스피 지수는 4% 남짓 오르는 데 그쳤다. 그나마 정부가 연초부터 ‘증시 밸류업 프로그램’을 띄운 게 이 수준이다.

이유는 국내 투자자의 철저한 외면이다. 특히 개인 투자자들은 한국을 팔고 미국을 사는 ‘주식 이민’을 감행하고 있다. 국내 주식을 11조원 어치를 순매도했지만, 미국 주식은 8조원 어치를 순매수했다. 주식형 상장지수펀드(ETF)도 마찬가지다. 순매수 톱10이 모조리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다. 이 와중에 국민연금 마저 국내 투자 비중을 줄이고 있다. 수익이 별로인 데다 향후 기금 고갈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외국인들만 ‘값싼’ 한국 주식을 주워 담았다. 하지만 최근 환율이 흔들리면서 이마저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이제 증시에 남은 건 횡행하는 단기 매매, 그리고 ‘국장(국내 증시) 탈출은 지능 순’이란 유행어다.

24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의 모습. 뉴스1

24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의 모습. 뉴스1

결국 출산율이나 증시나 ‘우상향’의 반전을 만들어내려면 어떻게든 이런 자조를 희망으로 다시 바꿔내야 한다. 그러자면 2015년을 기점으로 질적 변화를 일으킨 또 다른 지표에 주목해야 한다. 그해를 기점으로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2%대로 떨어졌을 것이란 게 여러 기관의 추정이다. 본격적인 저성장 구조가 고착되며 역동성과 활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건 부처 키우고, 인센티브 좀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정부도 안다.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 내려면 도무지 진척이 없는 노동·규제·연금 개혁의 불씨부터 어떻게든 되살려야 한다. 장기 과제라며, 국회가 움직이지 않는다며 한가롭게 시간 보낼 때가 아니다. 정말 비상사태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