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102세 할머니의 커버 스토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지난 주말 발간된 패션 잡지 보그의 독일판 표지 모델이 화제다. 통상 7~8월 여름 호 표지는 늘씬하고 젊은 모델이 노출 의상을 뽐내는 모습으로 장식되는데 올해는 그 자리에 단아한 빨간색 피코트를 입은 백발 할머니가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102세 홀로코스트 생존자 마고 프리드랜더(Margot Friedlander). 역대 보그 독일판 표지 모델 중 최고령이다. 해당 매체의 SNS 계정에는 수 십만 개의 ‘좋아요’와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가 달렸다.

독일에서 마고 할머니는 이미 셀럽(유명인)이다. 2004년 우드스톡영화제는 그녀의 인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으며 2008년에는 자서전도 출간됐다. 1921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녀는 나치 정권이 유대인 학살에 나서자 이혼한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해외이주를 추진했다. 하지만 계획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유대인 신분을 숨기고 살던 중 어머니와 남동생이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체포돼 아우슈비츠에 수용됐고 결국은 죽음을 맞았다.

올해 4월 베를린 보타닉가든에서 촬영한 102세 마고 프리드랜더 할머니의 독일판 보그 7~8월호 표지. [보그 독일 인스타그램 캡처]

올해 4월 베를린 보타닉가든에서 촬영한 102세 마고 프리드랜더 할머니의 독일판 보그 7~8월호 표지. [보그 독일 인스타그램 캡처]

홀로 남은 마고는 신분세탁을 위해 이름을 바꾸고 머리카락도 빨갛게 물들이며 위험한 코 성형까지 감행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주 생활 중 함께 지내던 유대인의 배신으로 결국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나치 수용소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미래의 남편 아돌프를 만난다. 그녀는 한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심정을 밝히며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증언한 바 있다. “아돌프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둘 다 인간으로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보다 아픔이 우리를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이후 남편과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 60여년 동안 브루클린에서 살았던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뜨자 2010년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여생을 사랑과 통합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바치겠다고 다짐한 마고 할머니는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 매진했다. 이런 그녀의 노력을 높이 산 독일 정부는 지난해 그녀에게 정부 최고의 포상을 수여했다.

마고 할머니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긴 인생을 살며 자신의 힘으로 거역할 수 없었던 역사와 그 굴레에서 겪은 아픔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그 미소가 맑은지. 문득 그녀의 자서전 제목이 떠올랐다. ‘네 인생을 만들어라’(영어판 ‘Try to Make Your Life’). 어머니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 전 딸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모진 세월의 풍파를 이기며 자신의 인생을 꿋꿋하게 만들어온 마고 할머니의 미소는 그 유언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