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혐오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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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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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영접한 시간은 새벽 2시45분이었다. 한밤중에 포옹한 두 독재자의 모습 뒤로 79년 전 한반도 운명을 거머쥐었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과 소련군 군사위원 스티코프 중장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레닌그라드를 사수한 명장(名將) 스티코프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1945년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앞장세워 공산정권을 설계했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을 움직였고, 남한의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조종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준비작업을 지휘한 ‘미니 제3차 세계대전’의 원흉이었다.

핵을 가진 북·러 포옹은 안보 악재
야당도 정부·여당과 협력해야
이재명, 방탄 위해 일극체제 완성
이 판국에 혐오는 공멸 가져올 뿐

이번에는 소련의 후신(後身) 러시아의 군 통수권자인 푸틴이 날아와 북·러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이 가능해졌고 북·러 군사동맹이 부활했다. 남한을 침략한 북한, 우크라이나를 쳐들어간 러시아라는 두 핵무장 국가의 결합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 안보 지형을 뒤흔드는 대형 악재다. 스탈린·스티코프 주역의 악몽이 79년 만에 되살아나고 있다.

폐쇄 국가의 미숙한 독재자 김정은이 놓치고 있는 치명적 함정이 있다. 소련이 그랬듯이 러시아도 사정이 달라지면 북한을 외면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2021년 러시아와 한국의 무역규모는 265억 달러, 북한과는 4만 달러고 수입은 전무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는 표정부터 바꿀 것이다. ‘빈자(貧者)의 무기’ 핵을 움켜쥐고 불안한 동맹에 매달리는 국제사회의 왕따 북한을 마주하려면 흔들리지 않는 배짱이 필요하다. 초당적 협력과 지혜가 절실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입법 권력을 쥔 더불어민주당의 ‘차르’ 이재명 대표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주지 않은 대가가 북·러 군사동맹이냐”고 일갈한다면 푸틴은 움찔할 것이다. 김정은도 한국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러나 네 건의 재판 결과에 운명을 건 그는 당을 친명 일색의 ‘신정(神政)국가’로 만들었고, 정부·여당과는 비타협 모드다. 총선 이후 종부세 완화, 국민연금 개혁 카드로 민심에 접근했지만 어느새 방탄을 위해 입법권을 남용하고 있다. 무더기로 배지를 단 대장동 변호사들을 법사위에 배치했고, 수사 검사들의 탄핵을 추진하고 있다. 대북송금 사건 재판에서 측근인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에게 징역 9년6개월이 선고되고 자신도 공범으로 기소되자 특검법을 통해 판결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언론을 향해서는 “검찰의 애완견”이라는 폭언을 날렸다. 3권분립 원칙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와 동갑인 민주당 최고위원은 “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 대표”라며 90도 인사를 했다. 북한 “어버이 수령님”과 무엇이 다른가. 이 대표는 “선을 넘었다”고 질책하는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이로써 이재명 일극체제가 완성됐다. 정치적 경쟁자를 완벽하게 축출한 민주당에 남은 것은 ‘차르’를 향한 영혼 없는 충성 경쟁뿐이다. 비주류를 포함한 다양한 세력의 갈등과 통합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전제는 무너졌다.

옥스퍼드대 영문학 교수인 C S 루이스는 2차대전 와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글을 가디언에 연재했다. 노련한 악마는 신참에게 충고한다. “지옥의 전체 철학은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과는 별개’라는 원칙을 인식하는 데 있다… 자기가 확장되려면 다른 사물을 밀어내거나 흡수해야만 하지… ‘존재한다’는 것은 곧 ‘경쟁한다’는 뜻이야.” 그렇다.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 목숨을 거는 세상은 지옥이다. 이대로 가면 이 대표가 저절로 대통령이 될 것 같지만 민심은 다르다. 여론조사 호감도 1위는 아직 몸도 풀지 않은 오세훈 서울시장이다. 국민은 분별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

내년이면 분단 80년을 맞는다. 부끄러운 일이다. 38선은 1945년 미국과 소련의 합작품이지만 가상의 분단선은 무수히 그어져 왔다. 임진년(壬辰年)인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9월 1일 점령지 평양에서 명나라 심유경에게 대동강을 기준으로 조선을 동서로 나누자고 제안한다. 강대국에 의한 최초의 분단 시도다. 이념이 다른 남과 북의 대립은 외세가 개입하기 딱 좋은 위험천만한 구조다. 핵무기 사용을 거론하는 두 독재자의 악수는 불온하고 불길하다.

체코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자 극작가인 하벨은 전설의 새 베룬다 이야기를 꺼낸다. 몸은 하나지만 두 개의 머리, 두 개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머리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 자갈과 독을 삼킨다. 그는 “혐오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자마자 우리는 베룬다의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불가능의 예술』). 베룬다는 어쩌면 스탈린과 스티코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한반도가 아닐까. 이재명 대표는 언제까지 이 지독한 혐오의 정치에 매달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