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일본도 배임죄 있지만…한국 적용범위 넓고 가중 처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95호 09면

이복현 금감원장이 꺼낸 ‘배임죄 폐지’ 논란

“삼라만상을 다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배임죄는 현행 유지보다 폐지가 낫다.” 이복현 금감위원장이 14일 “세계 주요 선진국 어디에도 없다”면서 쏘아 올린 ‘배임죄 폐지론’이 경제계는 물론 시민사회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를 명시하는 대신 재계의 반발을 고려해 배임죄를 없애자는 게 이 원장의 논리인데, 재계의 반발은 여전하고 시민단체는 ‘재벌 봐주기’라며 연일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사실 배임죄가 이 원장의 주장처럼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배임죄를 명시한 나라 가운데 한국이 가장 넓게 배임죄를 인정하고 있고, 더불어 처벌도 가장 센 편이다.

미국·영국은 배임죄 없어 사기죄로 처벌

대한상공회의소 등에 따르면, 독일과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형법에 ‘배임죄’를 명시하고 있는 반면 미국·영국에는 배임죄라는 범죄 자체가 없다. 대신 미국·영국은 배임에 해당하는 사안을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사기죄로 처벌하고 있다. 미국은 일찍이 1982년 루이지애나 대법원 판결 이후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을 확립했다. 경영자가 기업 이익을 위해 성실하게 경영상 판단을 내렸다면, 회사에 손해를 끼쳤더라도 책임을 면하는 내용이다. 그만큼 기업인의 경영판단을 존중해준다.

세계 최초로 배임죄를 형법에 규정한 독일 역시 기업의 경영상 판단일 경우 책임을 면해준다. 일본은 형법상 배임죄와 상법상 특별배임죄가 있지만, 처벌 범위는 제한적이다. 고의성이 입증된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도록 요건을 명확히 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이에 비해 한국은 배임죄에 대한 면책 조항이 따로 없고, 범위도 광범위하다. 우리나라는 형법상 일반·업무상 배임죄가 있을 뿐 아니라 상법상 특별 배임죄를 별도로 두고 있다. 한국의 배임죄는 또 여기서 다가 아니다. 배임으로 인한 이득액이 5억원 이상이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에 의해 가중 처벌된다. 배임죄를 가중 처벌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는데, 특경법상 배임으로 인한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이면 최고 무기징역(또는 5년 이상 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다. 형법상 살인죄(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최고형은 사형)와 같은 수준으로, 이는 재계의 반발을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인죄와 같은 처벌 규정 때문에 법조계에서도 그동안 논란이 돼 왔다. 최준선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상법으로 특별배임죄를 적용할 수 있는데, 특경법으로 가중처벌하는 건 과도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용 기준도 모호하다. 하태헌 법무법인 세종 파트너 변호사는 “배임은 유사한 사건임에도 유·무죄가 달라진다든지, 1·2·3심 결론이 다 달라질 정도로 요건이 불명확한 혐의”라며 “일본처럼 고의성이 입증된 경우에만 배임을 처벌하는 것처럼 요건을 더욱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23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횡령·배임죄의 무죄율(1심 기준)은 5.8%로 전체 형사사건 무죄율(3.1%)의 두 배에 육박했다. 이 원장이 14일 “(배임죄에 대해) 경영 판단의 원칙을 명확히 하자”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독일처럼 경영상 판단이라면 배임으로 처벌할 수 없도록 하자는 얘기다. 이승희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이 2021년 6월 공개한 ‘재벌 총수 일가와 전문경영인의 배임·횡령 등 범죄와 형사처벌·취업제한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11~2021년 10년간 배임·횡령죄로 기소된 재벌 총수 일가는 22명이다. 이 중 1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처벌됐다.

재계는 이런 상황에서 충실의무에 ‘주주’까지 명시하는 상법이 개정되면, 배임죄 논란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3월 국내 상장기업 153개사(코스피 75개사·코스닥 78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밸류업을 위해 주주 충실의무 제도가 도입되면 ‘주주대표소송과 배임죄 처벌 등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61.3%에 달했다. 대한상의는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서는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등 규제보다 자유로운 기업 경영 활동을 보장해주는 법제도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횡령·배임죄 무죄율, 형사사건의 두 배

하지만 배임죄 폐지나 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특히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원장의 배임죄 폐지 시도가 ‘재벌 봐주기’라며 반발하고 있다. 시민단체와 법조계 일각에선 배임죄가 ‘회사 경영자의 부정을 방지하고 견제하는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국 국장은 “우리나라처럼 재벌 중심의 소유·지배구조를 해외에서 찾기 힘들기 때문에, 한국의 배임죄 규정을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도 “대주주와 소액주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사회가 회사의 이익을 우선하는 판단을 내리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데, 배임죄를 없애자는 것은 오히려 주주 권익 보호에 역행하는 밸류다운이 될 수 있다”며 “상법 개정과 배임죄 폐지를 맞바꿀 카드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