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젠슨 황이 한국에 왔다면 엔비디아 나왔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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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 자수성가형 기업 다수 시총 1위 도전

한국 시총 1위는 삼성전자가 20여 년 독주

규제가 기업혁신 가로막는 현실 돌아봐야

설립 31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상장사 기록을 세운 미국 인공지능(AI) 반도체 회사 엔비디아(Nvidia)의 회사명은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에서 따왔다. 인비디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질투의 여신이다.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 등 창업자 3명이 “모든 사람이 질투할만한 멋진 회사를 만들자”는 포부를 담아 지은 이름이다. 엔비디아가 지난 18일 뉴욕 증시에서 시가총액 3조3350억 달러(약 4600조원)를 기록,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을 제치고 시총 1위에 올랐다. 1963년 대만에서 태어나 9세에 미국으로 이민, 학창 시절 최저시급을 받으며 허드렛일을 했던 젠슨 황은 지금 순자산 1190억 달러로 블룸버그 억만장자 순위 12위에 올랐다. 회사명처럼 모든 기업인의 선망과 질투를 받는 대상이 됐다. 이틀 뒤 엔비디아 주가가 빠지면서 시총 1, 2위 자리를 다시 MS와 애플에 내줬지만 차이가 크지 않아 당분간 엎치락뒤치락 순위다툼이 이어질 전망이다.

엔비디아의 성장 속도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불과 1년 전 반도체 기업 중 처음으로 시대를 가르는 신기술과 혁신의 상징이라는 시총 1조 달러를 찍었다. 그 후로도 주가가 계속 올라 몸집이 세 배 이상 커졌다. AI 열풍으로 엔비디아의 주력 제품인 그래픽처리장치(GPU)가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수요가 몰린 덕분이다. 골드러시 시대에 곡괭이와 삽을 팔던 이들이 돈을 벌었던 것처럼 AI 시대에 필수적인 고성능 GPU를 파는 엔비디아가 돈맥을 잡았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볼 일이 아니다. 엔비디아는 철저하게 AI 생태계를 주도했다. 이 회사가 2006년 출시한 GPU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쿠다(CUDA)’는 AI 개발자의 필수도구다. 또 오로지 계산능력을 높이는 컴퓨팅에 선택과 집중을 한 것도 성공요인이다. 끊임없는 기술 개발을 통한 혁신과 초격차라는 경쟁력이 엔비디아를 가장 비싼 상장사에 등극시켰다.

엔비디아라는 개별 기업을 넘어서 선두주자가 끊임없이 바뀌는 미국 증시의 활력은 부럽기만 하다. 미국 증시에서 2001년 이후 시총 1위에 오른 기업은 MS와 애플, 엔비디아를 포함해 6개다. 대개 1세대 창업주가 경영을 맡은 자수성가형 기업이다. 유럽 증시에서도 시총 1위를 두고 명품 기업 LVMH, 비만 신약으로 유명한 노보 노디스크,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치열하게 경쟁한다. 하지만 한국 증시는 1999년부터 삼성전자가 줄곧 1위다. 지난 20여 년간 시총 1위 삼성전자에 도전한 기업이 없다. 시총 상위 기업 중 상속이 아닌 창업으로 성장한 곳은 네이버와 카카오, 셀트리온 정도다. 이러니 한국은 혁신기업의 무덤이라는 한탄이 나와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왜 엔비디아 같은 초고속 성장기업이 없을까. 아쉬워하기 전에 우리의 혁신 환경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에선 멀쩡하게 하는 비즈니스인데 갈라파고스 규제 때문에 우리나라만 못 하는 사업이 한둘이 아니다. 한국은 ‘타다금지법’을 만들어 택시의 혁신을 원천봉쇄한 나라, 개인과 개인 간의 승차공유를 법으로 막아 놓아 우버가 버티지 못하고 떠난 나라다. 근로시간 유연화를 비롯해 우리 기업 환경을 짓누르는 낡은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과도한 규제를 풀기는커녕 산업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노란봉투법’ 같은 규제를 추가하려고만 한다. 젠슨 황 같은 혁신가가 한국에 이민을 왔다면 엔비디아 같은 ‘질투 나는 기업’을 키울 수 있었을까. 답답하지만 그 답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