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7>

장사 밑천 없이 인도양에 들어온 포르투갈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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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유럽인 도착 이전에 아시아의 교역 세계가 ‘평화의 낙원’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인들이 관세를 지불하고 현지 군주에게 예물을 바치고 해적의 활동을 어느 정도 억제하기만 한다면 인도양은 ‘자유의 바다’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가 해상운송을 통째로 장악하려 든다는 것은 상인들에게나 군주들에게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1498년 어느 날 전투태세를 완비한 바스쿠 다 가마가 칼리쿠트 항구에 들어서면서 이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윌리엄 번스틴의 〈교역의 세계사: 멋진 주고받기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2009)의 한 대목이다. 폭력 없는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1498년에 시작해 포르투갈인이 가져온 폭력은 인도양세계에 유례없는 수준이었다.

William Bernstein,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William Bernstein,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1498년 이전의 인도양에는 해적이 있어도 꽤 얌전한 해적이었다. 배를 덮쳐도 재물만 빼앗고, 인질을 잡아가도 합리적 수준의 몸값으로 풀어줬다. 강도 높은 토벌을 유발하지 않도록 눈치를 본 셈이다. 포르투갈인은 그런 눈치를 보지 않았다.

실패 같아 보인 대성공, 다 가마의 인도양 항해

1488년에 바르톨레뮤 디아스가 인도양 입구 희망봉 부근까지 갔다가 돌아온 후 10년 만에 다 가마의 함대가 인도양에 들어섰다.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떠난 네 척의 배가 12월 16일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에 들어섰다. 동아프리카 해안을 북상해 4월 14일 말린디(케냐)에 도착하고 4월 24일 말린디를 출발, 대양을 가로질러 26일 만에 칼리쿠트(지금의 코지코드)에 도착했다. 매우 순조로운 항해였다.

다 가마 함대의 리스본 출발 광경(1497).

다 가마 함대의 리스본 출발 광경(1497).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돌아오는 길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칼리쿠트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8월 29일 서둘러 떠나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건너오는 데 100여 일이 걸렸다. 선원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선원 중에도 괴혈병 환자가 많았다. 가는 길은 아랍인 항해사를 고용해 계절풍에 맞췄지만 오는 길에는 바람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네 척의 배 중 두 척이 1499년 7월과 8월에 돌아왔고, 170명 대원 중 55명이 살아 돌아왔다. 황급히 떠나는 바람에 실어 온 화물도 빈약했다. 돌아오는 길의 다 가마의 행적을 보면 그 자신도 이 항해의 성과를 실패로 여긴 것 같다.

다 가마는 서아프리카 연안에 도착한 1499년 4월 25일 항해일지 작성을 중단했다. 그리고 병에 걸린 동생을 돌보겠다며 배들을 먼저 귀국시켰다. 함대 사령관, 또는 선장의 책임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행동은 실패의 책임에 대비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몇 주일 후 다른 배에 편승해 귀국할 때는 성대한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화물이라도 가치가 대단한 것이었고, 앞으로 제대로 챙겨올 때는 얼마나 큰 노다지가 될지 전망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인도양 원정대 파견이 포르투갈의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다 가마 자신도 1502년에 훨씬 더 큰 함대의(15척에 약 800명) 제4차 원정대를 이끌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따낸 포르투갈의 승리

인도양 진입 초기 포르투갈인의 폭력성을 드러낸 인물은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1502년 다 가마의 두 번째 원정에서 엽기적인 소행이 특히 이름 높다. 저항하는 현지인을 잡으면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는 짓이 예사였다. 칼리쿠트 군주가 사절로 보낸 승려를 첩자라 하여 혀와 귀를 자르고 개의 귀를 꿰매 붙여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4백여 명 순례자를 태운 배를 나포해 약탈한 다음 사람들이 탄 채로 불태워 버린 일도 있었다.

이 극심한 폭력성의 이유 중에는 가해자들의 절박한 심정도 있었을 것 같다. 다 가마의 제1차 원정에서 170명 중 55명이 생환했다. 1500년에 출발한 카브랄의 원정대도 13척 중 5척만이 돌아왔다. 선원들은 살아 돌아갈 가능성이 절반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509년 2월의 디우 해전(Battle of Diu) 승리도 이 절박한 심정으로 이뤄진 측면이 있다.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의 디우 포구에서 벌어진 이 해전을 통해 포르투갈인의 인도양 제해권이 확보되었다. 오토만제국과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이 함대를 보내 구자라트 술탄과 연합함대를 만들었고, 베네치아도 지원을 보냈다. (베네치아는 중동 지역을 거치는 기존 교역로를 지키는 데 이슬람세력과 이해관계가 맞았다.)

양측 모두 카라크(Carrack)가 주력선이었다.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고 대포를 적재하기 좋은 카라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이슬람세력도 이탈리아 상업세력과의 접촉을 통해 대포와 카라크를 잘 갖추고 있었다. 디우 해전에서 현지세력이 10척, 포르투갈이 9척의 카라크를 동원했다.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임전태세의 차이였다. 포르투갈인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든 반면 현지세력에게는 이득을 위한 싸움이었다. 이집트와 오토만제국의 참전은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통한 기존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디우 항구 장관은 두 길 보기였다. 포르투갈 배든 무슬림 배든 교역이 이어지기만 하면 되니까. 전투의 어느 단계에서 디우 병력이 물러서며 결판이 났다.

포르투갈의 카라크. 1565년경의 지도에서.

포르투갈의 카라크. 1565년경의 지도에서.

여러 크기의 카라크가 그려진 1521년경 포르투갈 그림.

여러 크기의 카라크가 그려진 1521년경 포르투갈 그림.

밑천 없는 장사, 해적질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인이 짧은 시간 내에 제해권을 확보한 것은 항구에 성곽 등 견고한 방어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고 일반 선박의 무장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유럽인의 교역활동에는 무력이 자주 동원되었기 때문에 선박도 항구도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인도양은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번스틴의 말처럼 “자유의 바다”였다.(국제법의 개척자 그로티우스(1583-1645)의 1609년 책 “Mare Liberum”에서 따 온 말이다)

15세기 초 압도적 무력을 싣고 나타난 정화 함대도 이 생태계를 교란하기보다는 참여해서 한 몫을 맡았다. 그런데 그 백년 후의 포르투갈 함대는 가장 큰 것이 정화 함대의 10분의 1 규모였음에도, 그 힘으로 모든 경쟁세력을 파괴하고 교역을 독점하겠다고 나섰다. 인도양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악질 해적의 출현이었다.

어쩌면 폭력성의 가장 큰 원인은 장사 밑천이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싣고 온 금속제품이나 직물이 아프리카 남해안을 돌아올 때까지는 현지민의 환영을 받아 식량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동해안을 북상해 이슬람문명권에 들어서자 조악한 유럽 상품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첫 항해 때부터 포르투갈 측이 교역에 내놓을 상품이 없어서 분쟁이 일어났다. 인기 있는 중국 상품을 싣고 온 정화 함대와는 다른 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인이 인도양에 가져온 물건 가운데 확실한 상품가치를 가진 것은 금과 은뿐이었다. 향료 등 인도양 상품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얼마 동안 유럽의 금과 은을 박박 긁어서 가져와야 했다. 아메리카 은광의 대량 채굴이 시작되어 전 세계적 교역 양상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16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에 앞서 일본의 은이 포르투갈인의 사업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 (아메리카 은광의 본격 개발 전) 일본의 은 생산은 전 세계 생산의 3분의 1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이와미(石見) 은광이 1526년 개발되고 조선인 기술자들을 통해 회취법(灰吹法)을 도입하면서 생산량이 급증했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의 명나라 조공무역이 중단되었다. 중-일간 공식 무역의 중단으로 포르투갈인을 위한 틈새가 마련된 것이다.

이와미 은광 제련소 유적. 1526년 개발되어 연간 38톤까지 생산하던 이 은광은 1923년에 폐광되었다.

이와미 은광 제련소 유적. 1526년 개발되어 연간 38톤까지 생산하던 이 은광은 1923년에 폐광되었다.

‘은(銀)의 배'가 마련해준 포르투갈의 장사 밑천 

차우두리는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에서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인 활동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지역의 잠재적 경쟁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중요한 여러 항구를 삽시간에 점령하고 고아에 인도총독부(Estado da India)를 세운 1515년까지가 ‘개척기’였다.

1560년까지 ‘전성기’는 항로의 독점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한 시기였다. 요새화된 일련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한 정기적 항로 시찰로 항행 통제를 시도했다. 인도총독부의 최우선 과제는 유럽 시장을 향한 경쟁 노선인 중동 방면 교역로의 봉쇄였다.

1560년 이후 ‘쇠퇴기’의 두 가지 변화를 차우두리는 지적한다. 하나는 현지인의 도전으로 항로 독점이 약화된 것이다. 말라카해협을 장악한 포르투갈세력을 피해 순다해협(자바섬과 수마트라섬 사이) 항로를 무슬림 상선이 많이 이용하게 되었고 그 거점이 된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Aceh) 술탄국이 강력한 함대를 갖추면서 중동 항로가 되살아났다.

또 하나 변화는 포르투갈인의 활동에서 현지 교역 참여가 많아진 것이다. 인도양 일대는 인구와 경제력에서 유럽과 단위가 다른 규모였고 교역량도 엄청나게 컸다. 항로의 장악력을 확보한 포르투갈인들에게 현지 교역 참여가 매력적인 옵션으로 떠올랐다. 고아-마카오-나가사키 항로가 이 방향의 대표적 사업이었다.

1513년부터 중국 연해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포르투갈인은 40년 동안 교역상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554년에 교역 허가를 받고, 3년 후 마카오 기지의 임대가 시작되었다. 마카오의 성장에는 일본과의 교역이 계기가 되었다. 1543년에 시작한 일본 교역의 성장으로 1550년부터 고아와 나가사키(長崎) 사이의 매년 운항이 시작되고, 마카오가 그 중간기항지가 되었다.

고아와 나가사키 사이를 운항한 배에는 양쪽에서 서로 다른 별명이 붙었다. 일본 별명 ‘구로후네(黑船)’에는 크고 튼튼한 괴선박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이 비쳐 보인다. 포르투갈 별명 ‘은(銀)의 배(nau da prata)'는 무엇을 가지러 일본에 다닌 배인지 보여준다.

일본의 ‘구로후네’ 그림.

일본의 ‘구로후네’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