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수필집 『허송세월』 낸 작가 김훈 "속세에 통하는 글 쓰고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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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76)이 산문집 『허송세월』(나남)로 돌아왔다. “삭아드는 인생의 단계”를 절감한다는 그가 “겪은 일을 겪은 대로” 쓴 글 43편을 묶었다.

노년의 저자가 술과 담배를 끊으며 겪은 “추접스러운 꼴”, “신체 부위와 장기마다 골병이 든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부터 신경림·박경리·백낙청 등 문인에 대한 단상, 세월호 침몰을 돌이키며 쓴 글까지 인간과 자연, 문학과 사회, 그 밖의 온갖 “지지고 볶는” 이야기가 담겼다.

2022년 서울 여의도에서 강연 중인 김훈 작가. 김상선 기자

2022년 서울 여의도에서 강연 중인 김훈 작가. 김상선 기자

지난 19일 저자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질문을 팩스로 보낸 후 연필로 꾹꾹 눌러 쓴 답변을 팩스로 받았다. 육필(肉筆)을 고집하는 이유는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기" 때문.

질문을 보낸 지 32분 만에 받은 세 장의 원고지엔 지우거나 고쳐 쓴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과거 강연과 인터뷰에서 기계를 싫어하며 앞으로도 컴퓨터 같은 기계를 익히는 법을 배울 생각이 없다고 여러 번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김훈이 보내온 인터뷰 답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원고지를 팩스로 보냈다. 홍지유 기자

김훈이 보내온 인터뷰 답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원고지를 팩스로 보냈다. 홍지유 기자

장편 소설 『하얼빈』이 나온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신간을 냈다.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지는 않은데.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허송세월이 아닌 것이 아니다. 세월을 허송하지 않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알아야 한다. 시간이 늘 새롭다는 것이 인간의 희망의 원천이다.
책에 술과 담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주종(酒種)별 정의를 읽으면서는 무릎을 쳤다. 먹을 것으로는 수제비와 라면, 사는 얘기로는 밥벌이하고 지지고 볶는 이야기다. 생활밀착형 수필이랄까. 
말에 말미암은 말을 나는 싫어한다. 나이 먹어감에 따라서 나는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됐다. 나는 속(俗)에 통(通)하는 글을 쓰고 싶다.

다음은『허송세월』에 나오는 술의 정의다.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있다.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하고 생로병사하는 아수라의 술이다. 사케는 겨울의 술이고, 나이 든 사람의 술이다.”(‘앞에’ 중)

문학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나.
나는 문학 지상주의에 반대한다. 문학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승에 가서 ‘말(言) 재판’을 받는 꿈을 꿨다고 썼다. 말을 불신하는 이유는.
말은 불완전한 도구다. 그리고 위태로운 척도다. 요즘 한국 사회의 위기는 대부분이 말의 위기다. 참으로 큰일이다.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해야 한다.  

그는 원고에 ‘큰일이다’라고 쓰고 그 앞에 ‘참으로’를 기워 넣었다. “말을 하려다가도 말이 뜻을 저버릴 것 같아서 미덥지 못하고, 이 귀머거리들의 세상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말들은 흩어져서 할 말이 없어진다”고도 했다. (‘말년’ 중)

책은 허무주의적이다. 그런데 최근의 지향은 인본주의에 가까운 것 같다. 자신을 휴머니스트라고 여기나.  
나는 인간과 세상의 허무를 늘 쓰면서, 또 거기에 도전하는 또 다른 모습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로만 ‘허송세월’할 뿐 일 중독자 같다. 아직도 '필일신'(必日新)의 마음으로 글을 쓰나. (김훈의 작업실 칠판에 적힌 세 글자.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미다.)
‘필일신’은 옛 선인이 하신 말씀인데 두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다. 나는 노는 게 좋다. 나는 일을 놀이로 만들려는 꿈을 버리지 못한다. 이것도 힘든 일이다. 

그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저승사자가 “너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 있느냐”고 묻자 “두어번 뿐”이라고 답했다고 그는 책에 적었다. 그런데도 책에서는 기어코 희망의 냄새가 난다.

김훈 산문집『허송세월』사진 나남

김훈 산문집『허송세월』사진 나남

“꽃 핀 나무 아래서 온갖 냄새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노년은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 미세먼지 속에서 아기들이 태어나서 젖 토한 냄새를 풍겨주기를 나는 기다린다. 이 마지막 한 문장을 쓰기 위하여 나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호수공원의 봄 2’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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