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재훈의 음식과 약

음식보다 식단이 먼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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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식단에는 힘이 있다. 단일 식품 섭취로 혈압을 낮추기는 어렵다. 하지만 식단으로는 혈압을 낮출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이미 고혈압을 막는 식이요법(DASH)이 혈압 조절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채소, 과일, 통곡물을 섭취하고 저지방 또는 무지방 유제품, 생선, 가금류, 콩, 견과류, 식물성 유지를 포함하는 식단이다. 동시에 육류는 지방이 적은 부위로 먹고 당분 함량이 높은 음료나 단것을 적게 먹고 나트륨 섭취를 제한한다. 이렇게 하면 약 없이 식단만으로 고혈압 환자의 혈압이 6~11㎜Hg까지 내려간다. 혈압이 정상인 경우는 2~3㎜Hg 내려간다.

이러한 식단의 효과는 1992년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후원한 연구를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고혈압인 사람이 DASH 식단을 따르면 혈압약을 끊거나 용량, 가짓수를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식단을 설계해 내 건강과 환경까지 지킬 수 있다. [중앙포토]

식단을 설계해 내 건강과 환경까지 지킬 수 있다. [중앙포토]

식단으로는 치매 예방도 가능하다. 2015년 미국의 영양 역학자 마사 클레어 모리스 박사는 마인드(MIND) 식단으로 나이 들면서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것을 늦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마인드 식단이란 지중해 식단, 고혈압을 막는 식단의 기본 골격에 채소와 베리류 섭취를 강조한 방식이다. 엽채류와 베리류, 견과류, 통곡물 섭취가 많으면 뇌 건강이 더 좋은 상관성에 근거하여 일주일에 최소한 6접시 이상 엽채류를 먹고 2접시 이상 베리류를 먹을 것을 권한다.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마인드 식단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지 기능 저하가 늦춰지고 치매 위험이 감소하며 사후 부검에서 알츠하이머병 징후가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인과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충분히 긍정적이다.

식단으로 내 건강에 더해 환경을 지킬 수도 있다. 2019년 세계 16개국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만든 비영리재단 EAT은 의학 학술지 ‘랜싯(Lancet)’과 함께 지구 건강을 위한 식단을 제안했다. 식물성 식품을 더 먹고 육류, 유제품을 덜 먹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식단이다. 2024년 6월 미국임상영양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식단을 제일 잘 따르는 사람들의 조기 사망 위험이 최하위 그룹보다 30% 낮게 나타났다. 암으로 인한 사망 위험은 10%, 심혈관 질환 14%, 폐 질환 47%, 알츠하이머병 28%로 질환에 의한 사망 위험도 더 낮았다. 지구 건강을 위한 식단은 2050년까지 세계 인구가 100억 명에 달한다고 가정할 때 환경을 지키면서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도록 설계된 식단이다. 모두가 이런 식단을 따른다면 온실가스 방출량 29% 감소, 농지 사용 51% 감소, 비료 사용 21% 감소가 예상된다. 식단은 유연하다. 렌틸콩 대신 두부를, 올리브유 대신 들기름을 먹어도 된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일 식품이 아니라 식단이다.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