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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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화엄경 강의를 마치자마자 미리 싸둔 걸망을 들고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함이다. 차창 밖으로 고층빌딩이 홱홱 지나가고, 한강을 건너 빠르게 서울을 벗어났다. 어디쯤엔가 멀리서 모내기를 마친 논이 보였다. 물을 가득 품은 논에 잔디처럼 생긴 어린 벼들이 햇살을 받아 푸릇한 빛깔로 웅성거렸다. ‘아, 나도 저리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테지.’ 생각이 덮치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동시에 논에 물 대러 나간다던 아버지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힘겨운 상황 묵묵히 버텨내고
역경 극복해 가는 것이 인생
어려워도 자신 믿고 도전해야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가 논에 물 들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어른들은 논이 마를까 봐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주 걱정했다. 가진 게 너무 없어서 논에 물 대는 것도 큰일인 시절이었다. ‘거친 밥 먹고 물 마시며 팔 구부려 베게 삼아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지 아니한가(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 이런 폼나는 공자님 말씀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저 궁핍한 유년의 삶이었다.

장마철이 지나고도 이삭이 나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루 이틀 기다려서 되는 일도 아닌데, 나는 노을이 붉게 물들 때까지 논둑에 앉아 이삭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심부름으로 새참 막걸리 받아서 가져오는 길 중간에 너무 더워 주전자 뚜껑에 따라 마시며 벼 바라기를 한 적도 있었고, 남의 논두렁에서 잠이 들어 업혀 온 적도 있었다. 대체 왜 빨리 크지 않냐고 투정하듯 어른들께 여쭈고 나면, 쓴웃음을 보이거나 한숨을 내쉬며 철부지라는 꾸지람만 돌아왔다. 그때 고개 숙인 내게 곁에 있던 어머니가 일러주셨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그 말씀을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다시금 새겨듣고 답한다. “그렇죠. 모든 것에는 숙성할 시간이 필요한 거죠.”

청풍명월(淸風明月)에는 값이 없다 했던가!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어릴 적 맑은 추억과 오버랩되면서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대구에 도착했다. 올 초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은사스님이 계신 절에 내려가 법회를 본다. 대구 화성사(化城寺)는 지금 내가 머무는 서울 청룡암보다 훨씬 크고 넓은 도량이다. 그런데 실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번에도 일정을 조정하여 일손 보태러 내려가는 길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곳은 출가자로서 나의 뿌리요, 집이다. 그러니 내겐 푸근한 고향집이나 다름없다.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이 말인즉슨 ‘똑똑하고 잘난 아이는 절을 떠날 거야’라는 의미다. 부러진 나무였을지언정 살면서 나는 굽은 나무였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들었을 땐 못에 찔린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무던해졌다. 나중엔 넉살 좋게 “맞아요. 맞아” 하면서 ‘이 절은 나와는 무관한 곳’인 것처럼 책임감도 함께 내려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일찌감치 독립했고, 대중 포교에 힘쓰며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은사스님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고집 센 어린 상좌에 불과했나 보다. 처음엔 미덥지 않은 눈으로 걱정하며 지켜보는 게 역력했다. 하지만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서 장성한 자식의 살림살이를 바라보듯 든든해 하는 게 느껴진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이 안정될 시간, 믿고 맡길 시간, 사랑할 시간, 용서할 시간, 곤경을 헤쳐 나갈 시간,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 그 숱한 시간 동안 나는 주변의 삶보다도 나 자신의 발걸음에만 관심을 두었다. 스스로 힘겨운 나날을 묵묵히 버텨야만 하는 시간이 내겐 필요했고, 그것은 결국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의 힘을 길러주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핀란드에는 ‘시수(Sisu)’라는 정서, 즉 생활 철학이 있다고 한다. 역경을 만났을 때 불굴의 의지로 내면에 힘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파고들어 극복하는 힘이다. 잦은 전쟁과 혹독한 기후, 굶주림 등의 척박한 역사를 견뎌오면서 단단하게 형성된 정신력이라고 한다.

고통 없는 인생이란 없으니, 핀란드인들이 말하는 ‘시수’를 우리 인생에도 적용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도 각자에게 닥친 힘든 상황을 잘 통제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시수’는 회복탄력성과 역경 극복을 강조한다.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자신을 믿고 도전한다면 자존감도 높아질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아 있든지 간에, 우리는 그 시간을 직접 보내야 한다. 시간이란 게 모아둘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빌려줄 수도 빌려올 수도 없다. 매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며 손에 쥔 시간을 허투루 내보내지 않아야겠다.

결국,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에는 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내라는 봇짐에 숙성된 모둠의 시간을.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