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에 발목 잡혀…힘겨운 ‘8만전자’, 업계 “내년 수요 2배, 삼성 안 늦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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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호 12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 주가 희비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의 ‘엇갈린 희비’가 눈길을 끌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연일 신고가를 경신 중인데, 삼성전자는 9만원 고지 탈환을 넘보던 4월 초 8만원대 중반에서 내려와 7만~8만원 사이를 횡보하고 있다. ‘8만전자’ 문턱에서 삼성전자의 발목을 잡은 것은 고대역폭메모리(HBM) 품질 논란이다. 지난달 외신은 삼성전자 HBM이 발열과 전력 소비 문제로 미국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일 “테스트가 안 끝났을 뿐, (루머는)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엔비디아가 SK하이닉스엔 HBM 공급량 확대를 요청한 것이 알려져 삼성전자 HBM을 둘러싼 품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일각에선 삼성전자가 차세대 반도체인 HBM의 타이밍을 놓친 게 아니냐는 ‘실기(失期)론’마저 나온다. SK하이닉스는 2013년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했고, 10년 넘게 기술 노하우를 축적했다. 특히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80% 이상 점유한 엔비디아에 4세대 HBM인 HBM3을 사실상 독점 공급하면서 선점 효과를 누리고 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삼성전자는 지금껏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으로 경쟁자들을 누르는 ‘초(超)격차’로 글로벌 맹주 지위를 유지했다. 한국 기업 간 경쟁이지만 유독 HBM에서만큼은 1인자가 아닌 추격자가 되면서 체면을 구긴 것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삼성전자는 AI 관련 산업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던 2019년 무렵 사업성 등을 이유로 HBM 개발을 잠시 중단했다”며 “HBM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때를 위한 준비가 조금은 덜 됐던 것 같다”고 전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레거시 메모리 제품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재용 회장이 수년간 사법 리스크로 새 먹거리 개척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환경도 작용했을 것”으로 해석했다.

HBM은 2022년 말부터 이어진 ‘챗GPT’ 등 생성형 AI 열풍으로 AI 반도체 시장이 활짝 열리면서 중요성이 커졌다. HBM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 처리와 사용이 핵심인 AI 시대에 ‘게임 체인저’로 꼽힌다.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한 고성능 메모리인데, 면적당 높은 용량을 확보할 수 있어 일반 D램보다 대(大)용량의 데이터 처리가 가능하고 처리 속도도 크게 빨라진다. 이를 통해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 등 성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여기서 2인자로 뒤처져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삼성전자를 조이고 있다. 반도체 사업 수장인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을 지난달 전영현 부회장으로 전격 교체한 것도 이 때문이란 해석이 나왔다.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 정말 늦은 걸까. 전문가들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분석에 무게를 둔다. 우선, 이제 막 태동해서 급성장 중인 시장이라 수요는 폭증세인 반면 공급은 태부족하다. 신영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3억2000만GB(기가바이트)였던 글로벌 HBM 수요는 올해 11억5000만GB로 1년 만에 3.6배, 내년엔 22억3000만GB로 2년 만에 7배 폭증할 전망이다. 박상욱 신영증권 연구원은 “엔비디아의 신제품이 출시되면서 수요가 공급을 크게 초과하게 된다”며 “기존 SK하이닉스나 마이크론 물량만으로는 역부족인 만큼 삼성전자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많은 수요가 엔비디아 한 곳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삼성전자 역할론의 배경이다. 현재 AI 반도체 시장에선 미국의 AMD와 인텔 등 후발주자가 엔비디아를 추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AMD와 인텔의 AI 반도체에 HBM을 납품하고 있는 만큼 이들 기업의 수요 증가가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빅테크 역시 자체 AI 반도체 개발을 진행 중이다. 잠재고객이 빅테크를 중심으로 쌓이고 있는 것이다.

HBM이 기술 집약적인 분야임에도 결국은 ‘규모의 경제’ 싸움이라는 반도체 산업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도 삼성전자엔 위안거리다. 자본력을 바탕으로 공장 증설 등 생산량을 증대하면 평균 발생 비용은 줄여, 이익을 극대화하고 다시 투자 여력을 키우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올해 4월 5세대 HBM인 HBM3E 8단 제품 양산을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HBM3E 8단 제품을 공개한 후 반년 만이다. 올 2분기 안엔 HBM3E 12단 제품 양산도 시작할 예정이다. HBM만 놓고 보면 업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각종 문제점을 보완하므로 생산을 늘릴수록 수율(결함 없는 합격품 비율)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 47조5000억원을 투입했다. 이를 바탕으로 HBM 생산능력을 올해 말까지 2배 이상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관건은 HBM에서만큼은 후발주자가 된 삼성전자의 초격차 전략이 이번에도 통할 수 있느냐다. 삼성전자가 현재 개발 중인 HBM3E 12단 제품은 업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한 36GB로 현존 최대 용량이다. 김영권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차세대 제품 개발 가속화가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며 “올해 말쯤엔 HBM3E 매출이 전체 HBM 매출의 60%를 초과할 것”으로 내다봤다.

삼성전자는 적층 단수가 16단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6세대 HBM인 HBM4의 내년 양산도 계획 중이다. SK하이닉스의 HBM4 양산 목표 시점인 2026년보다 1년 앞당겨 양산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내줬던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최근 엔비디아 품질 테스트 결과로 논란이 된 것도 HBM3E 12단 제품이었던 만큼, 삼성전자가 차세대 제품의 유의미한 경쟁력 확보까지는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관련 업계 한 임원은 “삼성전자가 후발 분야인 만큼 기술력뿐 아니라 영업력과 제품 기획력 등의 역량 강화를 강도 높게 모색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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