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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화가의 고려대박물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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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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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인생에선 주인공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진리를 곱씹게 된 건 엊그제 고려대박물관 기획전시실을 둘러보면서다. 오는 30일까지 열리는 ‘달맞이꽃의 작가 이규호 화백 회고전’은 이규호(1920~2013)씨의 유족이 그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마련한 전시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무명’으로 치부하는 건 결례지만, 이씨가 우리 미술 교과서에 이름을 남기거나 억 소리 나는 경매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지 않는 ‘평범한’ 화가임엔 분명하다. 그런 전시에 굳이 발품을 판 건 더중앙플러스에 기자가 연재하는 ‘더 헤리티지’에서 그를 다룬 적 있어서다. 실은 기사에서 이씨는 조연이었고 한국 조각계가 낳은 비운의 천재 권진규(1922~1973)가 주연이었다.

고려대박물관 기획전에 선보인 화가 이규호(1920~2013)의 ‘달과 달맞이꽃’ 130.2x162.2㎝(1984년). [사진 고려대박물관]

고려대박물관 기획전에 선보인 화가 이규호(1920~2013)의 ‘달과 달맞이꽃’ 130.2x162.2㎝(1984년). [사진 고려대박물관]

이씨는 1962년 8월 31일부터 1977년 3월 12일까지 고려대박물관 학예직(서기)으로 근무하면서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전시실을 여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평가가 무르익지 않았을 무렵, 적극적으로 학교와 화단(畫壇)을 매개하면서 초기 수작들을 대거 박물관에 귀속시켰다. 지난해 현대미술전시실 개관 50주년 특별전 당시 관람객들을 놀라게 만든 박수근·이중섭·김환기·장욱진·천경자 등 호화 컬렉션이 그 덕에 가능했다. 기사에서 권진규의 대표작 ‘마두’ ‘자소상’ ‘비구니’가 고려대박물관에 모이기까지 사연을 전하면서, 이씨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 같은 존재라고 비유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말하자면 테오 반 고흐가 남긴 유작들을 보러 간 거였는데, 전시실을 둘러볼수록 겸허해졌다. 대략 1978년부터 달과 달맞이꽃을 소재로 파고들기 시작한 그의 화업은 구상에서 반구상으로, 향토색 서정에서 원색의 화려함으로 시대와 함께 변주했다. 약 90점에 이르는 작품 속 이씨는 빈센트도 테오도 아니었고, 권진규를 발굴한 박물관 학예사도 아닌, 화가 이규호였다. 그의 작품에 예술성·상품성을 논할 재간은 없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성실·우직하게 살았단 건 알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고려대에서 사후 회고전을 열어주고 싶다는 유족의 뜻을 박물관 측이 수용하면서 성사됐다. 지난해 50주년 특별전을 통해 이씨의 공헌이 재조명된 측면도 크다. 이씨의 아들 이종훈씨는 기자에게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미술관(박물관)이 드물던 시절, 좋은 작품이 사라지지 않고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게 한 아버지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면서 “누군가의 헌신이 바탕이 돼 교육과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단 걸 학생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 고려대 전시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이름이 없는 게 아니듯, 이름 없는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사회 곳곳 ‘조연’들이 많다. 조연이 잘해야 주연이 산다. 그런데 조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니 아예 새로운 드라마가 가능하단 걸, 모처럼 되새겨보았다.

1973년 5월3일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실 개관식에 참석한 조각가 권진규(왼쪽). 오른쪽에서 세번째 다소 작은 키에 안경 쓴 이가 당시 박물관 직원으로서 현대미술실 개관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권진규의 예술혼을 지지, 격려했던 이규호씨다. 사진 고려대박물관

1973년 5월3일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실 개관식에 참석한 조각가 권진규(왼쪽). 오른쪽에서 세번째 다소 작은 키에 안경 쓴 이가 당시 박물관 직원으로서 현대미술실 개관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권진규의 예술혼을 지지, 격려했던 이규호씨다. 사진 고려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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