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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땅에 떨어진 권위를 살릴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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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부부의 '세기의 이혼'소송 1심과 2심이 180도 다른 결과가 나오면서 1심을 맡았던 판사의 행보가 다시금 눈길을 끈다.

2022년 12월 6일 1심에서 최 회장에게 2심의 20분의 1인 위자료(1억)·재산분할(665억원)을 내도록 판결한 김현정 판사는 이듬해 초 사표를 낸 뒤 로펌으로 이직했다. 그러자 전주혜 국민의힘 의원(당시)은 지난해 2월15일 "(김 판사가) 대형 로펌에 간 건 굉장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SK가 이 로펌에 사건을 의뢰한다면 1심 판결 보은으로 보일 수 있다"고 국회 법사위에 출석한 김상환 법원행정처장에게 따졌다. 김 처장은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했다. 법원 최고위 관계자가 의원의 추궁에 '전적으로 동감'한 건 이례적이다. 사법부 스스로도 김 판사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 아니겠는가.

전 전 의원이 지적한대로 김 판사가 이직한 로펌에 SK가 사건을 의뢰하는지 여부와 관련해 SK 측은 "해당 로펌은 전부터 SK가 사건을 맡긴 곳으로, 지난해 의뢰도 예년 수준"이라며 억측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믿겠다. 하지만 "(김 판사 로펌행이) 사실관계를 떠나 모양새 자체가 법원의 신뢰를 깎아내린다"는 전주혜 전 의원의 지적은 여전히 귓전에 맴돈다.

사법부의 권위를 의심하게 만든 사례는 또 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3심을 담당한 이흥구 대법관의 동향이다. 그는 조 대표와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로 교지 '피데스'에서 함께 활동하는 등 친분이 깊다고 한다. 조 대표는 저서 『나는 왜 법을 공부하는가』에서 "(이 대법관이) 법대 동기로 같이 잘 어울렸다. 정의감이 투철했다"고 썼다. 이 대법관은 2020년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조 대표와 친분이) 회피 사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적극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묘하게도 이 대법관이 속한 대법원 3부에 지난 4월 조 대표 사건이 배당됐다. 하지만 12일 현재까지 대법원에 접수된 회피 신청은 없다고 대법원 관계자가 밝혔다. 그는 "이런 경우는 절차가 까다로운 회피 대신 판결에 빠지는 방식으로 피해 가는 게 대법관들 관행"이라면서도 "이 대법관이 그럴지 말지는 오직 본인에 달렸다"고 했다. 한마디로 3심 선고가 나와야만 그의 처신이 뭐였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선고문에 그의 서명이 있다면 회피 안 한 것이고, 없다면 회피한 것이란 얘기다. 이 대법관 말만 믿고 그의 회피를 기대해온 국민으로선 답답한 노릇이다. 이 때문이라도 대법원은 속히 판결을 내려야 한다. 조 대표가 2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은 지 넉 달이 지났다.

이런 마당에 민주당은 사법부에 '테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폭거를 가하고 있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 부지사가 1심에서 징역 9년 6개월을 선고받자 '판사 선출제'니 '법 왜곡죄' 신설을 추진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헌법이 못 박은 삼권 분립을 노골적으로 뒤흔드는 린치다. 그러나 민주당이 이런 반헌법적 행태를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된 환경은 판사들이 자초한 거나 다름없다. 6개월 안에 1심이 선고돼야 할 이재명 대표 선거법 재판부터 무려 16개월이나 지연한 끝에 담당 판사가 사표를 내버리지 않았나.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니 더욱 얕잡혀보이고, 민주당 입맛에 조금이라도 안 맞는 판결을 내리면 'ㅆㅂ' 문자를 받는 신세가 된 것 아닌가.

이 대표는 검사 사칭 사건에서 위증 교사 혐의로 기소돼 재판받고 있고, 그의 캠프 출신 인사 2명도 알리바이 관련 위증 교사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이재명의 장비'로 불렸던 유동규조차 정진상·김용으로부터 "핸드폰 버리라" "쓰레기 먹고 입원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나. 법원은 이렇게 이 대표 본인부터 주변까지 위증교사나 증거인멸 의혹이 만연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오직 법률과 양심에 따라 신속히 재판을 진행해야만 땅에 떨어진 권위를 회복할 길이 열릴 것이다.

이재명 사법리스크 관련 재판들이 유달리 지연되는 상황에서도 검찰은 1심에서 족족 유죄를 얻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이화영(징역 9년6개월), 김용(5년)등 최측근은 물론 '백현동 로비스트' 김인섭(5년·법정구속)과 김만배( 2년6개월) 최윤길(4년6개월) 등 대장동 연루자들이 줄줄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재명 사법리스크의 윤곽이 밑동부터 뚜렷해지는 형국인데, 정작 이 대표는 대장동 1심 재판만 지난해 3월 22일부터 448일째 받고 있다. 사법부가 스퍼트를 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