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의사 선생님, 이제 그만 하시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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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정부가 의사증원을 예고했을 때 의료계와 협의가 끝난 줄 알았다. 아니면 미묘한 쟁점이 약간 남아 있거나. 필자는 작년 말 칼럼에서 의사증원 1500명이 적당하다고 썼다. 의료계와 밀당하다 보면 1000명 수준에서 합의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정부는 2000명 증원을 전격 발표했다. 총선을 두 달 앞둔 강수였다. 선거에 미칠 손익 계산 끝에 한국 의료의 운명을 여론재판에 던졌다. 아니면 선심용 매물로 내놨거나.

이후 몇 달 동안 세계 수준의 신형 건축물이 너덜너덜해졌다. 기초석이 빠지고 기둥이 주저앉았다. 건축물에도 영혼이 있다면 신기(神氣)는 증발했다.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고 빈자리를 메우던 의료진은 탈진했다. 대학병원 봉직의들은 휴진과 파업을 거듭한다. 파묘 수준이다. 의사 증원은 내부 결함을 보완 수리하는 설계도의 한 품목이어야 했다. 그런데 덜렁 그것 하나였다. 수요자에 대한 선심공세였을까?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 학생들은 거리를 헤맨다. 텅 빈 캠퍼스와 폐쇄된 병동에는 정부의 강제명령이 들랑날랑할 뿐이다.

사전협의와 조율 과정 없이 ‘불쑥’
의사 증원 문제 의료계를 들쑤셔
휴진과 파업에 병원은 파묘 수준
가망없는 충돌 이제 거둬 들여야

정부도 그렇고 의료계조차 25년 전 의약분업 사태의 교훈을 버렸다. 의사를 ‘도둑놈’으로 몰아 끝내 정권의 목적을 이루긴 했지만 모두 상처투성이였다. 명의들이 허탈감을 안은 채 해외로 이주했다. 2004년 건강보험 재정 4조원 적자가 예상됐다. 수가 인상, 초·재진료 인상, 보험대상 약품을 늘렸다. 결국 건보료를 대폭 올려 때워야 했다. 그 후유증을 국민이 안았다.

이번에는 그 악몽이 두 배로 커졌다. 코로나 사태에서 겨우 벗어난 국내 대형병원들이 재정 적자 공습을 맞았다. 국립대 병원들은 정부 예산으로 버티지만 민간병원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코로나 사태에 병동을 통째로 헌납했던 계명대 동산병원은 물론, 한림대 성심병원 같은 민간병원엔 벌써 500억원 적자가 났다. 전공의가 없어 병동을 폐쇄하고 예약환자를 줄였다. 정부는 동네병원을 권하지만 중환자와 수술환자는 기피 대상이다. 의료사고 소송이 두렵다.

의사증원 논쟁이 한창이던 작년 말 의대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영광의 문을 통과한 수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고 운을 뗐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은 지식과 노동을 온전히 국가에 반납했음을 축하한다”고 했다. ‘마라도 의대’(있다면)든, ‘서울대 의대’든 스펙과 상관없이 의사들의 노동임금은 국가가 결정한다, 그것이 수가(酬價)다. 그랬더니 2학년 학생이 일어나 이해가 안 된다고 질문했다.

다시 말했다. 한국 의료는 “국가가 민간투자 보상비용을 100% 규제하는 세계 유일의 제도다.” 학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개인이 들인 투자비용, 지식자산, 진료행위는 자유시장에서 팔 수 없다. 고시가격이다. 전공의 수련비용도 국가가 내지 않는다. 유럽은 의사가 공무원이고 모두 국가부담이다. 그랬더니 조금 알아들었다. 학생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신작로가 아니었군, 그런 표정이었다.

의대생이 집단 휴강을 강행하는 유럽 국가를 본 적이 없다. 독일은 수련의와 의사가 현장을 이탈하면 지역별 조합에서 사직서를 받는다. 한국에서는 민간병원이라도 전공의가 이탈하면 정부가 복귀 명령을 내린다. 거부하면 면허정지다. 지난주 다급해진 정부는 대형병원에 전공의 사직서 수리금지 ‘취소 명령’을 내렸다. 갈 사람은 가도록 작은 창구를 허용했다. 전공의 수료까지 14년 동안 모두 개인 비용을 들였는데 정부가 운명을 이렇게 통제하는 게 한국이다. 의료복지에 헌신하라는 법적 명령이다. 주당 80시간 노동에 400만원 임금, 3년만 고생하자고 매일 다진 각오가 사전 협의 없이 불쑥 튀어나온 의사증원 정책에 여지없이 쑥대밭이 된 것이다. ‘3년 지나면 돈 많이 벌잖아’가 정부의 속내다. 의료체계 내부 결함과 의사들 민원을 거들떠보지 않는 정부의 막무가내 정책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세계수준의 의료를 힘겹게 지탱하던 인력과 대형병원들이 속수무책 무너져 내렸다.

정부는 마이동풍이다. 국민의 힐난을 감수한 채 의료진 이탈은 반복될 것이다. 막다른 낭떠러지에서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집단 휴진을 결의했다. 그 진동이 일파만파다. 이쯤 되면 정부가 태도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가망이 없다. 지난 정권은 최저임금제로 자영업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완급조정이 필요하다고 소리쳐도 막무가내였다. 자영업자를 부르주아로 간주했다. 현 정권은 의료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의사집단의 이기심도 문제려니와 정부가 막후 협의와 정밀 세공에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집값을 최고로 올려놓은 문(文)정권의 후예들이 국회를 장악했다. 면피 정치는 진보, 보수 모두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러하다. 그러니 의료체계 재건축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참아야 한다. 전공의들에게 돌아오라 할밖에. 산야를 떠도는 의대생들에게 강의실로 오라 할 밖에. 의사 선생님, 대책이 없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죠. 이게 우리 사회에서 가장 뒤떨어진 정치를 만든 우리의 원죄입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