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잃고 사흘간 울었다는 그곳, 백마고지가 눈앞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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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3호 22면

최전방 ‘호국보훈의 성지’ 고대산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접경의 고대산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본 모습. 남녘의 백마고지와 철원평야, 북녘의 구암산(김일성 고지)과 평강군이 내려다 보인다. 고대산은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다가 1980년대 초 개방하면서 주둔 부대는 철수했고 초소(사진 앞)는 비었다.. 김홍준 기자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접경의 고대산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본 모습. 남녘의 백마고지와 철원평야, 북녘의 구암산(김일성 고지)과 평강군이 내려다 보인다. 고대산은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다가 1980년대 초 개방하면서 주둔 부대는 철수했고 초소(사진 앞)는 비었다.. 김홍준 기자

38선을 돌파하고…이런, 대광리라니.

20대의 세 여름을 보낸 곳. 십수 년이 흐른 이 여름에야 다시 왔다. 근처 부대에서 사격 훈련 중인지, 총소리가 요란했다. 다음 주 제대하는 BTS 진이 이곳을 지키는 제5보병사단 신병교육대 조교라지. 코앞이 군사분계선 남방한계선이다. 경기 북부에서도 북쪽 끄트머리. 고대산(832m)이다.

“지난달에는 열 번, 이번 달에는 처음이고요.”

지난 4일,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에서 70년째 사는 김모(74)씨를 고대산 칼바위 근처에서 만났다. 김씨는 지난해 4월 교통사고로 양쪽 어깨와 왼쪽 무릎을 심하게 다쳐 두문불출했단다. 그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고대산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10여 년 전에 고대산에 한 번 온 게 전부였는데…”라고 말했다.

BTS 진이 신교대 조교인 5사단이 지켜

신탄리역은 고대산 산행 기점이다. 김홍준 기자

신탄리역은 고대산 산행 기점이다. 김홍준 기자

일각에서는 고대산이 연천군과 이웃한 강원도 철원군의 복계산(1057m)과 함께 등산이 허용된 최북단 산이라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강원도 고성군의 마산봉(1052m)이 더 북쪽에 있다. 마산봉보다 위도상으로 높은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1178m)도 오를 수는 있다. 케이블카로 말이다. 비무장지대(DMZ) 안이라, 제약이 많기도 하다. 고대산은 ‘등산이 허용된 산 중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산’이라는 표현이 맞다.

그래서 고대산도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었다. 1980년대 초에 등산이 허용됐다. 그러니까 김씨는 출입금지가 풀린 이후 40년간 단 1회 고대산에 올랐다가 올해 들어서만 11회로 ‘몰아치기’를 하는 것. 그는 “처음엔 다친 무릎이 시큰했는데, 점점 회복되는 게 느껴집니다. 산이 저를 살리는 것 같아요”라고 밝혔다.

고대산의 기점은 신탄리역이다. 역 뒤편에서 세 갈래 코스가 시작된다. 산 이름 ‘고대(高臺)’와 역명 ‘신탄(薪炭)’은 얽히고설켜 있다. ‘고대’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고래는 구들장 밑의 불길과 연기가 통하는 고랑을 가리킨다. 산의 골이 길고 깊다는 뜻이다. 신탄은 땔나무와 숯이다. 나무가 울창하다는 의미다.

고대산에 오르면 경원선 터널 구간과 백마고지 위령비, 백마고지, 구암산 등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고대산에 오르면 경원선 터널 구간과 백마고지 위령비, 백마고지, 구암산 등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김씨는 “산 높이도, 계곡 깊이도 딱 좋습니다. 초반엔 순하고, 중반엔 좀 험하고, 후반엔 다시 순해져요. 산도 운율이 있다니까요”라고 했다. 고대산 자연휴양림 뒤 무장애 산책로에서 만난 모녀(서울 송파구)도 같은 말을 했다. 김모(60)씨는 “정상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산 초입부터 깊은 숲에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전 말등바위·칼바위 솟구친 능선 상의 제2 등산로로 오르고 표범폭포가 포효하는 계곡길인 제3 등산로로 내려가고는 합니다. ‘선능후곡’이라지요”라고 했다.

표범폭포는 표범바위 아래 있다. 고대산 표범바위는 한탄강 지질공원 명소 18곳 중 가장 북쪽에 있다. 100m 높이에 화산활동이 빚은 무늬가 화려하다. 자연휴양림 입구에는 야구장이 있다. 2018년까지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의 홈구장이었다. 김씨는 “군사분계선에서 가장 가까운 야구장이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는 “70년째 여기서 살며 밭일하랴, 서울 공사장(철근 기술)에 일하러 나가느라 ‘뒷산’인 고대산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의 나이와 대광리에서 살아온 햇수 사이에 공백이 있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나왔다는 얘기다. 김씨가 대광리에 온 건 1954년 봄. 한국전쟁 휴전 직후였다.

탐방객들이 고대산 무장애 산책로를 걷고 있다. 김홍준 기자

탐방객들이 고대산 무장애 산책로를 걷고 있다. 김홍준 기자

4살 어릴 적에 대광리에 오셨군요.
“예. 경북 경산에서 왔습니다. 이곳이 수복되면서 올라왔죠.”
경산이라면, 여기서 거리가 꽤 되네요.
“3남 2녀 중 막내였습니다. 한국전쟁 통에 아버지께서는 행방불명 되셨고요. 막막해진 어머니가 삼 형제만 키우고 누나 두 명은 일자리로 내보냈습니다. 저 앞에 백마고지와 철원평야를 되찾아 여기가 남쪽 땅이 되면서 올라온 거죠.”
표범폭포는 고대산 제3 등산로의 백미다. 김홍준 기자

표범폭포는 고대산 제3 등산로의 백미다. 김홍준 기자

표범폭포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그의 말은 ‘행방불명된 아버지’와 ‘일자리로 보낸 누나들’ 부분에서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이곳 고대산에도 전쟁 통에 행방불명된 이들이 어디엔가 있다. 제5사단은 2008, 2010, 2011년 고대산에서 총 15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산 정상인 고대봉에는 유해 발굴 기념 표지판이 있다. 그 표지판 뒤, 북쪽으로 백마고지와 철원평야가 보인다.

백마고지(395고지)에서는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이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포탄 총 27만 4954발을 주고받았고, 12차례의 공방전 끝에 주인이 7회나 바뀌었다. 우리 군은 3500명, 중공군은 3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김일성, 철원평야 빼앗기고 큰 상실감

고대산 정상 표지석. 김홍준 기자

고대산 정상 표지석. 김홍준 기자

김일성 북한 주석은 일명 ‘김일성 고지’라 부르는 고암산(780m)에서 백마고지 전투 패배 소식을 접하고는 사흘간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사흘간 울었다는 설도 있다). 백마고지 전투로  철원평야를 되찾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컸다는 얘기다. 철원평야는 3번 국도 옛길과  경원선이 지나는 병참선이었다. 게다가 당시 서울 면적(268㎢)의 두 배가 훨씬 넘는 약 650㎢에 달하는 거대한 옥토이기도 하다. 905년 궁예가 대동방국(大東方國)을 내세우며 도읍지로 삼은 곳.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표현도 쓴다. 비무장지대에서 나오는 철원오대쌀은 씨알 굵고 찰기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피로 지킨 기름진 곳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따르면, 백마고지에서는 총 67구가 발굴돼 고 편귀만 하사 등 4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김씨는 “다행이죠. 70년 지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찾아보셨습니까.
“아뇨.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이입니다.”
누나들은요.
“이른바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어머니께서는 입이라도 덜려고 했던 거죠.”
고대산

고대산

어쩌면 전쟁이 만든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모습. 김씨는 고대산을 휘적휘적 내려갔다. 아픈 사람 같지 않게 힘찼다. 깊은 곳의 아픔을 어찌 겉에서 알 수 있겠나. 고대산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누구는 그리움을, 누구는 원망을 쏟아낼 수도 있다.

고대산 정상. 이제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 초소가 북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새만 넘나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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