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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이 키운 디지털 성범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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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BBC가 공개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버닝썬 사태와 관련한 핵심 인물인 승리, 정준영, 최종훈의 만행이 추가로 드러났다. 과거 한 파티 현장에서 승리가 여성의 손목을 잡아끌며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사진 BBC 유튜브 영상 캡처

BBC가 공개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버닝썬 사태와 관련한 핵심 인물인 승리, 정준영, 최종훈의 만행이 추가로 드러났다. 과거 한 파티 현장에서 승리가 여성의 손목을 잡아끌며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사진 BBC 유튜브 영상 캡처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영국 BBC가 만든 다큐멘터리 ‘버닝썬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공개되면서 희미해져 가던 버닝썬 사건에 대한 기억이 다시 소환되었다. 1시간 남짓한 영상에는 거대한 조직범죄를 밝히기 위해 나섰던 사람들이 얼마나 엄청난 개인적 희생과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연이어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수십 명의 주변 학생들을 먹잇감으로 삼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 사건에서도 역시 피해자가 수년 간 자력으로 범죄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알려졌다.

버닝썬 사건을 돌아보며 알게 된 것 중 가장 충격적이고 좌절스러웠던 것은 범죄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사건의 중심에 있던 가수 승리는 불법촬영을 동반한 성폭력, 성매매 알선 등 범죄에 대해 고작 1년 6개월의 형을 살고 출소하였다. 당시 이들과 유착하여 범죄자들을 비호하고 사건을 무마하려 했던 윤규근 총경은 벌금 2000만원을 선고받고 현재 다시 경찰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직전까지 그가 맡은 보직은 일선 경찰서의 범죄예방과장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가 특수강간, 마약, 집단 성폭행과 같은 범죄를 대하는 수준이다.

AI 함께 진화하는 디지털 성범죄
사이버 수사에 인력·자원 집중을
가벼운 처벌로는 성범죄 재생산
무관용 의지 명확한 메시지 필요

기술의 진화에 발맞추어 디지털 성범죄 수법도 나날이 진화한다. 디지털 강국인 한국은 불행히도 디지털 성범죄의 측면에서 선두국가이다. 2021년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 HRW)는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표제를 걸고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상황을 직접 조사한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한국 정부, 경찰과 검찰, 국회, 교육부 등을 대상으로 각각 구체적인 권고사항을 제시하고 대통령 앞으로 체계적인 문제 해결과 모니터링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첨부한 바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현실에서의 성범죄보다 그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다. 개인 존재의 근간이 되는 정체성과 명예를 송두리째 흔들기 때문이다. 서울대에서 이번에 일어난 사건은 공중화장실이나 탈의실과 같은 바깥 장소에서 일어나는 몰카 피해나 범죄집단의 협박과 폭력이 연루된 사건과는 또 다르다. 직장과 학교, 내 집과 같이 가장 친밀하고 익숙한 일상 안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울대 동문·지인 상대로 디지털 성범죄를 벌인 피의자 박모(40)씨가 검거되고 있다. 4일 성폭력처벌법 위반(허위 영상물편집·반포 등) 혐의로 구속 박씨의 첫 재판이 열렸다. 사진 서울경찰청

서울대 동문·지인 상대로 디지털 성범죄를 벌인 피의자 박모(40)씨가 검거되고 있다. 4일 성폭력처벌법 위반(허위 영상물편집·반포 등) 혐의로 구속 박씨의 첫 재판이 열렸다. 사진 서울경찰청

서울대 사건의 경우 피해자는 경찰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력으로 가해자를 추적하였다. 하지만 성범죄 피해자들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권력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털어놓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자살에 이르거나 이민을 가버리는 경우도 제법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미 범죄가 드러났을 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확률이 높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불법적으로 뿌려진 자신의 정보를 마주한 순간부터를 ‘생지옥’에 비하곤 한다. 생지옥은 범인이 잡히거나 사법적 판결이 이루어진다고 끝나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저장, 복제, 배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행여 누가 보았을까 사회생활은 심하게 위축된다. 보상이나 치유는 커녕 가까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까지 무너져 한없는 무기력 속에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이 깊고 긴 상처는 모욕이라는 단어로도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인정하자. 버닝썬 사건에 대한 처리가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를 만들어 낸 것이지, 해외에 서버 망이 있는 텔레그램 때문도, 딥페이크 기술이 진화해서도 아니다. 검색하면 각종 관계부처 합동 회의니 근절대책이니 요란한 정책 카드뉴스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각종 대책이 총망라된 정책홍보는 들러리로 전락하고 정작 성범죄자들은 금세 다시 활개를 치고, 공범인 경찰은 슬그머니 복직한다. 정작 피해자들은 2차 피해의 불안 속에서 공권력의 변변한 도움 없이 증거를 수집하고 범인을 잡아야 한다.

교육, 의식과 문화의 개선, 물론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아닌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먼저 할 수 있는 일 몇 가지라도 우선순위를 두고 실제로 충분한 자원을 투자하는 실행이 필요하다. AI와 딥페이크의 진화 속도에 따라 관련 법 개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사이버 수사대의 전문성과 인력을 확충하는 일에 제대로 된 투자가 이루어지길 촉구한다.

이번 서울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계기로 기업과 학교, 공공기관 등 조직은 성범죄의 경우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여 가해자가 사법적 판단과는 별개로 조직 차원에서 가장 강한 징계를 받고 퇴출되는 것은 물론 학교의 경우 재입학의 기회까지도 없애야 한다. 성범죄는 무관용이라는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만 이 무한반복에서 나올 수 있다. 무엇을 하겠다는 말 잔치보다 작은 실행이 먼저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