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사하면 연봉 2배 더 준다…대기업이 '민희진' 키우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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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어 분쟁’ 계기로 본 사내벤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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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분 80%를 보유한 자회사와 경영권 놓고 싸우는 게 가능해?” ‘하이브’와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분쟁을 두고, 요즘 대기업이 하는 얘기다. 엔터테인먼트 기업 최초로 대기업집단에 포함된 하이브와, 그 하이브가 지분 80%를 가진 레이블(자회사) 어도어 간 분쟁. 민희진 대표의 지난 4월 말 기자회견 이후 수많은 밈(meme)이 온라인을 뒤덮을 때, 대기업 신사업 담당자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을 월드 스타로 키운 하이브는 적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 ‘멀티 레이블’ 체제를 구축했다. 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여러 레이블 간 경쟁과 협력을 강화해, 다양한 IP(지식재산)를 지속해 배출할 수 있는 구조를 짰다. 기존 대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사내벤처·사내독립기업(CIC·Company In Company) 제도를 운영하는 것과도 유사한 방식이다. 정보기술(IT)·자동차·식품·금융 등 사내벤처에 열을 올리던 대기업들에서 CIC는 탈 없이 잘 굴러가고 있나.  대기업 사내벤처 육성 제도의 현황을 짚어봤다.

웹툰 담당 김 대리, 네이버 자회사 대표로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는 ‘CIC 신화’를 쓴 대표적 사례이다. [사진 각사]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는 ‘CIC 신화’를 쓴 대표적 사례이다. [사진 각사]

사내벤처로 성공한 대표적인 회사는 네이버다. 1997년 삼성SDS의 1호 사내벤처로 출발해 2년 뒤 독립했다. 국내 최초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도 LG데이콤(현 LG유플러스)의 사내벤처였다. 네이버의 이해진, 인터파크의 이기형 창업자는 성공한 후 사내벤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빠른 의사결정과 독립성이 신사업 개발에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네이버는 라인 성공 이후인 2015년 CIC를 본격적으로 제도화했다. CIC 리더에겐 대표 호칭과 자율경영 권한을 부여했다. 네이버웹툰, 스노우, 네이버파이낸셜 등 핵심 사업을 CIC로 키워 자회사로 만들었다. 한때 포털의 코너 중 하나였던 네이버웹툰은 2017년 분사 이후 네이버 콘텐트 사업의 미래를 대표하고 있다. 지난해 연간 거래액은 1조7800억원, 북미에서 IPO(기업공개)를 준비 중이다. 조석 작가 ‘마음의 소리’에 마감을 독촉하는 김 대리로 등장했던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가 이끈 성과다. 그를 믿고 밀어준 네이버 경영의 성공 모델로 꼽히기도 한다.

네이버가 재미를 본 CIC, IT 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통 산업군 기업들도 오래전부터 꽤 공들여 키웠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CJ제일제당·신한카드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은 매년 사내벤처 아이디어를 모집하고 육성 중이다. 목적은 명확하다. 성장이 정체한 상황에서 기존 방식대로는 신사업을 찾기 힘드니, 자율성·독립성 강한 조직을 통해 아이디어를 찾고 검증하고 키우자는 것. 사내벤처 컨설팅업체 패스파인더넷의 이복연 대표는 “5~10년 전만 해도 젊은 직원들이 스타트업 하겠다고 회사를 때려치우니 그들을 붙잡으려고 사내벤처를 운영하는 대기업도 있었으나, 요즘은 ‘앞으로 어떻게 더 성장해야 하나’란 본질적인 고민으로 돌아온 분위기”라며 “대기업이 성장 엔진을 찾고 시장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사내벤처를 장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수저’란 오해“일부러 태생 숨긴다”

CJ제일제당은 CIC 전용 공간을 운영한다. [사진 각사]

CJ제일제당은 CIC 전용 공간을 운영한다. [사진 각사]

사내벤처는 다른 스타트업으로부터 ‘금수저’란 소리도 듣는다. 대기업의 빵빵한 지원 속에 시작하니 ‘꽃길’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내벤처 창업자는 대기업의 후광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맨땅에 헤딩하는 일반 스타트업과 달리 모기업과의 협업 가능성이 있는 건 분명 장점이다. 다만, 다른 투자자나 파트너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왜 남의 자식을 키우나?’라는 편견이 꽤 강하기 때문. 교보생명 최초의 분사 창업 기업인 해낸다컴퍼니의 강문영 대표는 “벤처캐피털(VC)을 만날 때 사업성 검증을 받기 전엔 사내벤처란 말을 일부러 안 꺼낸다”고 말했다.

‘블랙패럿’과 ‘어거스트랩’은 삼성전자 프로그램을 통해 발굴한 CIC이다. [사진 각사]

‘블랙패럿’과 ‘어거스트랩’은 삼성전자 프로그램을 통해 발굴한 CIC이다. [사진 각사]

모기업에서 분사할 때 지분 구조는 천차만별. 보통은 대기업 지분이 20% 미만이다. 그 이상 출자할 경우, 자회사의 순이익을 보유 지분만큼 모기업 재무제표에 반영해야 하는 지분법 회계 영향이다. 초기 스타트업은 손익이 엉망이라 모기업 실적에 썩 도움이 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단계라 대규모 지분 투자를 하지 않는다. 금액으로는 보통 1억~5억원을 투자한다.

분사한 사내벤처가 수익을 내면 모기업도 지분에 따른 배당을 받는다. 하지만 초기 스타트업이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고, 배당을 받아도 대기업 입장에선 미미하다. 기업은 투자 수익보다는 아이디어 테스트베드, 협업 시너지를 위해 사내벤처를 활용하는 편이다. 사내벤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10대 그룹 관계자는 “솔직히 지금까지 스타트업에 투자한 지분으로 얻은 이익은 크지 않다”며 “혁신적인 아이템으로 ‘한 방’을 터뜨린다면 대박이겠지만, 재무적 수익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사내벤처의 매력은 대기업이 직접 시도하기 어려운 다양한 신사업 아이디어를 테스트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보통 5명 내외로 구성되는 사내벤처 팀은 의사결정이 빠르다. 현대차에서 분사한 스마트 윈도 필름 개발 업체 ‘디폰’의 이성우 대표는 “대기업이 5년에 1000억원을 들여 아이디어를 검증해 봐야 한다면, 사내벤처는 2년에 10억원만 써도 가능하다”며 “의사결정까지 오래 걸리는 대기업들이 신사업 검토를 사내벤처에 맡기는 편”이라고 말했다.

‘자유’의 삼성 vs ‘협력’의 현대차 vs ‘독립 보장’ 하이닉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대기업의 사내벤처 육성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국내 제조업을 대표하는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사례를 살펴보자.

현대차그룹은 꽤 일찍, 2000년부터 사내벤처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일단 선발되면 최대 3억원의 개발 비용을 지원한다. 1년간 제품·서비스 개발 및 사업화 기간을 거치며, 분사 또는 사내사업화 여부를 평가한다. 분사 시점에는 1억원을 투자해 스타트업 지분을 확보하고, 이후 그룹과의 협업 확대 정도에 따라 추가 투자를 진행한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사내벤처와의 시너지 효과를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로 자동차 관련 아이템이 많아 분사 후에도 협업을 지속하기 쉽다. 현대차에서 분사한 ‘엠바이옴’은 차량 실내 공기정화 신기술을 개발해 지난해 현대차 ‘디 올 뉴 코나’에 탑재했다. 코스닥 상장에도 성공한 ‘오토앤’은 현대차그룹과 협업해 스티어링 휠 테이블·다목적 트레이·차박용 에어매트 같은 전기차 전용 용품을 개발하고 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삼성전자는 창의적 조직문화 확산을 위해 2012년 사내벤처 프로그램 ‘C랩’(Creative Lab)을 도입했다. 현재까지 1600여 명의 임직원이 참여해 누적 406개 과제를 발굴·육성했다. 그중 62개 팀이 분사했다. 분사 시 삼성벤처투자를 통해 지분 투자가 이뤄지고, 삼성전자는 창업자 개인에게 연봉 두 배 수준의 창업 지원금을 준다.

C랩 경험자는 삼성전자가 분사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지만, 독립하고 나면 사실상 ‘자유 방임’에 가깝다고 말한다. 간섭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올해부터는 사업 실패 시 재입사 가능한 기간을 기존 5년에서 3년으로 축소했다. 이에 C랩 출신 사이에서도 “사후관리가 부족해 성공하기 어렵다”와 “스스로 생존할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뉜다. 익명을 요청한 C랩 출신 창업자는 “(사내벤처 중에서) 삼성의 기존 사업과 관련된 아이템은 내부 사업팀으로 흡수하고, 관련 없는 아이템만 분사하니 협업이 어려운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SK하이닉스는 2019년부터 사내벤처 프로그램 ‘하이개라지’를 운영하고 있다. 차고(Garage)에서 창업한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들처럼 하이닉스 내부에서 작게 시작해 거대한 성공을 만들자는 취지다. 창의적인 기업문화 조성과 더불어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선발된 팀에는 최대 2억원의 지원금과 전용 공간,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 모델로 구체화하기 위한 컨설팅, 창업 교육 등을 지원한다.

하이개라지는 분사해도 SK하이닉스가 지분 투자를 안 한다. 기술 창업을 권장하고 사내벤처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취지에서다. 회사는 “분사 전에도 사업을 본사로 내재화하라는 식의 경영 간섭을 전혀 안 한다”고 설명한다. 재직 중에도 법인 설립을 허용하고, 법인 명의로 얻는 수익도 인정해 주는 등 독립성을 보장한다. 그러면서도 분사 후 사업 실패 시 현업 복귀와 3년 내 재입사를 보장한다. 현재까지 28개 팀이 분사했는데, 이후 9개 팀은 사내로 복귀했고 19개 팀은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 분사한 사내벤처의 지난해까지 누적 매출은 400억원 이상, 외부 투자 유치는 약 300억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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