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윤고은의 모서리를 접는 마음

윙크의 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윤고은 소설가

윤고은 소설가

그는 ‘손가락’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숟가락’이었다. 나고야 공항의 입국 심사대 앞, 내가 손가락을 지문 인식기 위에 올리려던 참이었다. 옆에 있던 동행이 부연처럼 “손가락”이라고 덧붙이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게 왜 “숟가락”으로 발화된 것인지. 난데없이 등장한 숟가락에 웃음이 터졌다.

활자 하나가 달라지면 장소의 표정이 변한다. ‘손’의 부품 ‘ㅗ’와 ‘ㄴ’이 몸을 비틀어 ‘숟’이 되는 순간, 입국 심사대의 딱딱한 공기는 돌연 숟가락이 있을 법한 공간으로 변한다. 출입국 기록을 훑어보는 저 직원은 순식간에 스탠딩 바의 바텐더가 되고, 내가 돌려받는 건 여권이 아니라 긴 숟가락으로 살살 휘저을 수 있는 칵테일 한 잔이다. 상상은 촘촘하게 해야 제맛! 이럴 때 나는 세상이 찡긋, 한쪽 눈을 감는 걸 본다. 윙크의 순간이다.

어느 그릇 가게 앞에서도 윙크의 순간을 만났다. 아마도 그 가게에서 원래 내걸고자 한 것은 ‘Sale’이었겠지만 미완성인지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인지는 몰라도 유리창에 남아있는 건 ‘ale’ 뿐이었다. 글자를 뒤에서부터 붙이진 않을 테니 아무래도 첫 글자인 ‘S’가 떨어져 나갔을 확률이 높겠지. 덕분에 그 가게는 ‘할인’이 아니라 ‘(에일)맥주’를 내걸게 되었다.

의도한 바가 아닌데 거기 남은 글자가 맥주라니. 우연으로 장소에 새 표정이 붙는 순간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제는 그냥 ale은 너무 심심하고, Sale에서 하나를 떨어뜨린 ale만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굳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갈 길이 바빠서, 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정말 맥주를 팔까봐 두려웠던 건 아닐까? 아니야, 글자의 간격으로 보면 그건 Sale에서 떨어진 ale이 분명해, 윙크 수집가는 그리 믿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컬렉션을 지켰다.

윤고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