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김기린이 보고 싶었던 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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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린의 단색화 초기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70, 가운데 검은 바탕에 직사각형 두 점)이 출품된 전시장. [사진 갤러리현대]

김기린의 단색화 초기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70, 가운데 검은 바탕에 직사각형 두 점)이 출품된 전시장. [사진 갤러리현대]

“창에서 출발했어요. 창호지는 나의 먼 그리움이에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이 담긴 시간, 잊을 수 없는 고원의 겨울….”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 인터뷰)

인터뷰 영상 속 노화가는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먼 눈을 했다.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난 김기린(1936~2021, 본명 김정환)은 14세에 월남했다가 전쟁이 나면서 영영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보다 네 살 많은 설치미술가 이승택(92)은 같은 고향 출신 김기린에 대해 “집에 철학책이 많아 자주 빌려봤다. 개념을 물으면 설명해 줄 정도였다”고 돌아봤다.

그는 한국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생텍쥐페리를 공부하러 1961년 프랑스로 갔다. 발레리·랭보·말라르메 같은 시인이 되고 싶어 노트에 프랑스어 단어를 적으며 공부했지만 20대 중반의 문학청년에겐 버거웠다. 미술사를 청강했고, 그림을 배웠다. 시를 발표하던 김정환은 그림 그리는 김기린이 됐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교 동창이 “너는 목이 짧으니 기린이라고 하라”며 반어적으로 붙여줬던 별명이었다.

〈그림 1〉 “고향 집 창호지가 그림의 출발점”이라 했던 김기린의 ‘안과 밖’ 연작. 1997년경 종이에 그린 〈그림 1,2〉는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된다. 그림 3은 캔버스에 그린 1986년작. [사진 갤러리현대]

〈그림 1〉 “고향 집 창호지가 그림의 출발점”이라 했던 김기린의 ‘안과 밖’ 연작. 1997년경 종이에 그린 〈그림 1,2〉는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된다. 그림 3은 캔버스에 그린 1986년작. [사진 갤러리현대]

〈그림 2〉“고향 집 창호지가 그림의 출발점”이라 했던 김기린의 ‘안과 밖’ 연작. 종이 작업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그림 2〉“고향 집 창호지가 그림의 출발점”이라 했던 김기린의 ‘안과 밖’ 연작. 종이 작업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그림 3〉은 캔버스에 그린 1986년작. [사진 갤러리현대]

〈그림 3〉은 캔버스에 그린 1986년작. [사진 갤러리현대]

1967년 흰색·노랑·녹색·남색의 색기둥을 그린 추상화가 주목받았고, 1970년 검은 바탕에 검은 직사각형을 그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내놓았다. 오늘날 ‘단색화’라고 부르는 그림이다. 캔버스 위 검은 직사각형은 때로는 원고지나 문 창살 같은 격자무늬가 됐다. 1977년부터 그는 2m 넘는 대형 캔버스를 여러 겹 검게 칠한 뒤 십자형으로 4등분 하고 각 네모 안에 수없이 검은 점을 찍었다. ‘안과 밖’ 시리즈다.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30겹씩 찍고 또 찍어서 완성에 2년가량 걸렸다는 이 그림은 멀리서 보면 그저 검거나 붉은 평면이지만 다가가면 올록볼록 물감층이 도드라지며 리듬을 형성한다.

그는 2012년 인터뷰에서 “사각형 패턴을 해서 찍는데도 찍는 순간마다 점이 다 다르다. 그게 내 그림의 생명력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점을 찍는 순간만큼은 나를 넘어 뛴다.  계속해서 그림 그릴 수 있으면 나는 제일 충만된 시간을 사는 것”이라면서다.

김기린

김기린

그가 찍은 점은 한국어도 프랑스어도 아닌 그림으로 쓴 시였고, 고향 집 아침 햇살이나 달빛을 투과하던 문 창호지였다. 그림 그릴 때 내내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던 그는 “멘델스존에서는 노란색을 보고, 차이콥스키에서는 회색, 베토벤을 들을 때는 녹색이 떠오른다”고도 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던 그 ‘느낌’을 원색의 단색화로 남겼다.

유학 10년 만에 파리 국립 고등 장식미술 학교를 졸업한 그는 복원가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자기만의 단색화를 그렸다. 조카 민순기(61)씨는 “고모부가 파리 집 지하에서 종이를 물에 불리며 복원 작업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미술관 등에서 툴루즈-로트레크 같은 중요한 화가들의 작품 복원을 의뢰한다고 들었다”고 돌아봤다.

“내 자신이 반듯하게 서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나 내가 뭐 대단한 것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덤덤하게 말했던 ‘그림의 시인’, 김기린은 2021년 파리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5일부터  7월 14일까지 김기린의 작고 후 첫 개인전 ‘무언의 영역’이 열린다. 검은 바탕에 검은 사각형을 그린 1970년대의 초기 단색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연작부터 작고할 때까지 이어간 전면 점화 ‘안과 밖’ 연작 등 40여 점이 걸렸다.

특히 종이에 유화로 점을 찍어나간 1990년대의 ‘안과 밖’ 연작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영국 출신 화가이자 『모노크롬』의 저자인 사이먼 몰리는 “첫눈엔 아무것도 없는 듯하지만 이면엔 ‘비밀 코드’가 담긴 듯한 김기린의 그림은 ‘가까이 다가와서 보라’며 관객들을 적극 초대한다”며 “스마트폰에는 담기지 않는 그림의 본질을 전시장에 와서 직접 보시라”고 권했다.

바로 옆 갤러리현대 신관에서는 9일까지 ‘물방울 화가’ 김창열 회고전이 열린다. 김기린보다 7년 먼저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1929~2021)은 그보다 7개월 앞서 세상을 떴다. 고향 잃은 두 사람은 파리에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화폭에 그리고 또 그렸다. 어떤 이에게는 그게 물방울이었고, 다른 이에게는 점, 점,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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