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전설로 남을걸"…불혹 발레리나 4인, 무대 돌아온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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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을 대표하는 수석무용수였던 이들. 대한민국 발레 축제에서 한 무대에 오른다. 왼쪽부터 신승원·김지영·황혜민·김세연 무용수. 김경록 기자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을 대표하는 수석무용수였던 이들. 대한민국 발레 축제에서 한 무대에 오른다. 왼쪽부터 신승원·김지영·황혜민·김세연 무용수. 김경록 기자

1845년 7월 영국 런던의 한 극장. 빅토리아 여왕이 착석하자 막이 오르고, 4명의 발레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대를 풍미한 네 명의 무용수를 한 자리에 모았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된, '파 드 캬트르(Pas de Quatre)'의 초연 무대였다. 179년 후인 2024년 6월 5~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 이 '파 드 캬트르' 무대가 재현된다.

출연진의 면면은 1845년만큼이나 화려하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활약했던 쟁쟁한 무용수 네 명을 모았다. 주인공은 김지영(전 국립발레단), 김세연(전 유니버설발레단, 전 스페인국립무용단), 황혜민(전 유니버설발레단), 신승원(전 국립발레단) 전 수석무용수들. 야구로 치자면 박찬호ㆍ이종범ㆍ이승엽ㆍ선동열 선수가 다시 모인 정도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스타들이다.

현재는 대학 및 발레단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이들을 무대로 다시 초대한 건 대한민국 발레축제. '발레 레이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공연의 2막 첫 무대다. 다시 포앵트 슈즈(일명 토슈즈)의 끈을 조이며 연습에 임하는 이들을 지난 26일 경희대 연습실에서 만났다. 이번 공연에선 김지영이 마리 탈리오니, 황혜민이 파니 체리토, 김세연이 카를로타 그리시, 신승원이 루실 그란을 맡는다.

1845년 초연 당시 '파 드 캬트르'. 왼쪽부터 카를로타 그리시, 마리 탈리오니, 루실 그란, 파니 체리토.

1845년 초연 당시 '파 드 캬트르'. 왼쪽부터 카를로타 그리시, 마리 탈리오니, 루실 그란, 파니 체리토.

김세연·김지영·신승원·황혜민 무용수(왼쪽부터)가 지난 26일 경희대 연습실에서 '파 드 캬트르'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김세연·김지영·신승원·황혜민 무용수(왼쪽부터)가 지난 26일 경희대 연습실에서 '파 드 캬트르'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은퇴 전후, 만감이 교차했을 텐데요.  
김세연="스페인에서 무릎 부상을 겪은 뒤 다시 0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을 여러 번 겪었고, 또 주변의 후배들에게 더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훌륭한 무용수들은 많은데 자리는 많지 않거든요. 단장님께 이제 그만 내려오겠으니 제 월급으로 후배들 두 명 더 데려오시는 게 어떠시냐고 말씀드렸는데, '최고의 몸 상태라는 확신이 들 때 내려와, 기다려줄게'라고 하시더라고요. 마음에 확 와 닿았어요. 몇 년 더 했고, 저를 위한 안무작도 추고 난 뒤, 그 확신이 들었어요. 그때 미련 없이 내려왔죠. 지금은 파리오페라발레 단장님(호세 마르티네스)이 되셨는데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황혜민="기량이 좋을 때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었어요. 아이도 갖고 싶었고요. 마흔이 됐을 때 여러모로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는데, 은퇴도 자연스레 그런 타이밍이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무대에서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아쉬움은 없지만, 그리움은 항상 있었어요."  
신승원="현역 때 '이 이상으로 더 열심히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퇴단 결정이 쉽진 않았지만, 행복한 추억도 많고 후회는 없었어요. 국립발레단에서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통해 안무 경험을 쌓을 수 있었는데 창작 의욕도 생겼고요. 후배들에게 잠재력을 꺼낼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도 컸어요."  
김지영="저는 퇴단 계기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는데요, 퇴단하고 사실 굉장히 힘들었어요. (잠시 침묵) 퇴단하고 1주일 내내 꾼 꿈이 있는데요, 제가 각 나라 발레단을 돌아다니면서 오디션을 보는 거예요. '군무 작은 역이라도 좋다'면서요. 다른 무용수 리허설을 옆에서 보기도 했고요. 그만큼 무대라는 곳을 사랑했던 거 같아요."  
김지영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현재 경희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경록 기자

김지영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현재 경희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경록 기자

은퇴 후 좋았던 것도 있으시죠.
김세연="그럼요! 저 퇴단하자마자 공원에서 제 강아지와 100미터 질주했어요. 현역 시절엔 몸이 자산이니까 부상 위험이 있는 건 절대 안 했거든요. 공원을 그랑 주떼(공중으로 도약해 양 다리를 찢는 동작)로 뛰어다녔어요(웃음)."  
황혜민="헤어스타일 바꾼 거요. (현역 시절엔 망머리를 해야 했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염색도 하니 진짜 좋았어요(웃음)."  
김지영="무대에 대한 강박증이 사라진 거요. 실수하면 어쩌지, 이런 부담감이 없어진 게 좋았어요. 나이도 있고 하니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작은 실수라도 하면 나이 때문인가' 싶었고요. 은퇴하고 나니 그 부담감이 사라지고 더 편안하게 춤을 출 수 있게 됐죠."  
김세연 무용수. 유니버설발레단과 스페인 국립무용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했다. 현재 안무가이자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에서 후학 양성 중이다. 김경록 기자

김세연 무용수. 유니버설발레단과 스페인 국립무용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했다. 현재 안무가이자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에서 후학 양성 중이다. 김경록 기자

다른 작품도 아니고 '파 드 캬트르'로 복귀하는 것도 큰 결단이었을 텐데요.  
김지영="각자 시간 맞추기도 쉽진 않았지만, 연습은 너무 즐거워요.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매일 클래스(연습)에 참여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셔서 가고 있는데, 학생 때처럼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함께 동료들과 춤추고 농담하고 리허설하는 게 즐거워요. 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을 정도랍니다."  
황혜민="은퇴한 지 7년이 됐는데, 제 딸 로아가 '엄마가 무대에서 발레하는 거 보고 싶어'라고 하더라고요. 딸에게 제가 무대에 선 모습을 보여주는 건 제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이들과 한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죠."  
황혜민 무용수 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현재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 발레 미스트리스다. 함께 수석무용수였던 엄재용 발레리노와 딸 로아를 두고 있따. 김경록 기자

황혜민 무용수 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현재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 발레 미스트리스다. 함께 수석무용수였던 엄재용 발레리노와 딸 로아를 두고 있따. 김경록 기자

신승원="사실, 오랜만에 무대에 다시 서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웃음). 무대에선 정말 하나도 숨길 수가 없으니, 잔인하거든요.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끌어올리는 과정이 소중했어요."
김세연="유니버설발레단 현역 무용수들과 함께 클래스하면서 받는 에너지가 정말 커요. 선생님들도 격려해주셨고요. 감사하죠. 그런데 솔직히 그런 생각은 들었어요. 그냥 전설로 남아있을 걸(웃음)."  
어떤 의미일까요?  
김세연="이 작품 자체가 전설로 남은 발레리나들이잖아요. 그 작품으로 무대에 서겠다는 건 그만큼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지는데요. 사실 저희는 알거든요. 과거 현역시절처럼은 쉽게 돌아갈 수 없다는 걸요. 예전엔 저희 정말 잘했어요(웃음). 근데 이제 나이도 있고, 은퇴한 지도 꽤 됐고요. 잘하고 싶으니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솔직히 부담은 큽니다."  
김지영="괜찮아, 우리에겐 아직 2주가 있어(일동 웃음)."  
신승원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현재 동덕여대 교수다. 김경록 기자

신승원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현재 동덕여대 교수다. 김경록 기자

나이는 아무래도 피할 수 없죠.  
김세연="맞아요. 예전엔 24시간 중 18시간만 하면 됐는데 이젠 20시간은 해야 유지를 겨우 할 수 있기도 하고요. 쉬는 것도 일이 되죠."  
김지영="현역 시절과 똑같이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울을 보면 제 각도가 그때에 미치지 못할 때, 각성이 확 되면서 더 열심히 하게 돼요. 했었던 걸 못하게 되는 건 서글프죠. 하지만 받아들여야죠. 그리고 지금 저만의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몸을 100%로 활용한다는 거엔 희열이 있어요."
김세연="맞아요. 사실 저희가 예전에 다 했던 '백조의 호수'나 '돈키호테' 전막 공연을 이젠 다시 못하겠죠. 할 수 없을 거거든요. 훼떼 32바퀴(한 발로 올라서서 다른 다리를 회전시키는 테크닉)를 할 땐 엄청난 희열이 있는데. 하지만 지금 다시 토슈즈를 신으면서도 굉장한 짜릿함을 느껴요."  
각 무용수들이 '파 드 캬트르(Pas de Quatre)’에서 본인들이 맡은 발레리나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각 무용수들이 '파 드 캬트르(Pas de Quatre)’에서 본인들이 맡은 발레리나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파 드 캬트르' 초연에 대해선 마리 탈리오니, 파니 체리토, 카를로타 그리시, 루실 그란 이분들 사이 신경전이 치열했다는 설도 있는데요.   
김세연="당시 자리싸움이나 배역 분량 등을 놓고 신경전이 있었다는 얘기는 글쎄요, 제 느낌으론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었나 싶어요. 서로 긴장감이 있으면 무대에선 숨길 수가 없거든요. 관객은 다 느끼게 돼 있어요. 다들 개성이 다른 무용수들이 서로의 매력과 장점을 발산할 수 있는 무대라고 생각해요. 저희도 서로에게 주고받는 에너지가 엄청나요."  
신승원="19세기 초연했을 때 무용수들도 연습을 하면서 서로 화합하고 행복하게 췄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처럼요."  
황혜민="저희 네 명은 서로 한 무대에 이렇게 서는 게 처음이라 너무 신나요."  
김지영="19세기 대선배님들도 저희처럼 즐겁게 리허설하셨는지 궁금할 정도로 즐거워요. 이렇게 모인 것도 감사한 일이고, '나 때문에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도 있어요(웃음). 전우애가 생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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