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호구 벗어난 중국 클래식…한·중·일 교류 물꼬 넓힐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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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호 16면

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지난 4월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지안왕, 다케자와 쿄코와 실내악 3중주를 한 정명훈. [사진 상하이캐딜락콘서트홀]

지난 4월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지안왕, 다케자와 쿄코와 실내악 3중주를 한 정명훈. [사진 상하이캐딜락콘서트홀]

중국의 클래식 역사는 길지 않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으로 문화혁명이 끝나면서 서양 클래식이 부분적으로 도입됐고,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상하이 출신 관료가 수도 바깥에 클래식 인프라를 확충했다. 클래식 문화가 오래되지 않은 만큼 클래식 상품의 생산과 수입, 소비에서 오랜 과도기를 거쳤다.

지금도 서구 클래식 시장은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 중국 반환 전의 홍콩, 마카오를 세세히 구분하지 않고 ‘중국’(China)으로 인식한다. 중국의 G2 부상 이후, 서구 클래식 시장이 바라보는 중화는 경제적 의미에서 ‘하나의 중국’이 됐다. 201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의 시장 위상은 유럽 악단이 중국 투어를 전후해 잠시 서울에 들르는 정도였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의외의 소득이라면, 유럽 악단의 동북아 투어에서 서울이 중국에 부속된 이미지를 벗은 것이다.

이렇듯 201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오케스트라에 중국은 엘도라도였다. 리먼 사태, 유로존 위기로 유럽 각국의 중앙·지방정부가 악단에 교부하는 재정이 마를 때면 오케스트라는 아시아 투어, 엄밀하게 중국으로 10일에서 2주에 이르는 연주 여행을 떠나면서 운영 자금을 융통했다. 마침 중국이 시진핑 국가주석 취임 이후 ‘팍스 시니카’ ‘일대일로’ 로드맵을 제시하면서 미국을 뛰어넘은 중국의 구매력에 상응하는 고급 예술 소비를 유럽 오케스트라 공연이 채운다는 명분이었다.

미국 뛰어넘는 고급 예술 구매력 과시

방미 중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 방문한 펑리위안. [사진 줄리어드음악원]

방미 중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 방문한 펑리위안. [사진 줄리어드음악원]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통해 베이징 국가대극원과 상하이 동방예술중심이 생겼고, 시진핑 집권 이후 텐진, 난징, 칭다오, 장수, 우한, 광저우에 대형 클래식홀이 들어섰다. 오케스트라 입장에선 번거롭게 한국, 대만으로 건너가지 않아도 중국 본토에서만 7~10개 공연을 하고 넉넉한 출연료를 받았다. 2010년대 중반 런던 필하모닉이 새해 첫날 중국 공연을 한 건 영·중 선린 외교가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성탄 직후 연말에 해외 투어를 추진하면 서방 악단 노조는 반대했지만 중국은 그걸 보상해줄 돈이 있었다.

같은 시기, 중국 자금을 유럽 현지에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영국 오케스트라에 유행했다. 런던 심포니 대표 캐서린 맥도웰은 러시아 올리가르히(oligarch·신흥 재벌 집단)를 등에 업은 전임 음악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악단을 떠나자 중국 부동산 그룹 레인우드(Reignwood)를 스폰서로 유치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총액 10억원대 후원 약정을 중국 주류업체 우량예와 맺었다. 런던 예술시장에 눈독을 들인 중국은행(Bank of China), 중국공상은행(ICBC)을 잡기 위해 런던 매니지먼트가 꽌시(關係)를 고려해 중국 고관대작 자녀를 인턴으로 뽑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팬데믹부터 2023년 리오프닝까지 3년 동안 중국 경제는 크게 흔들렸고, 중국 자본에 의존해 포트폴리오를 짰던 서구 오케스트라도 체질을 바꾼다. 유럽 악단은 중국과 일본 대신, 회당 개런티가 낮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로 아시아 투어를 돌리고 공연 회수를 늘렸다. 뮌헨 필하모닉은 지난해 정명훈 지휘로 한국만 방문해 7회 공연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정부 재정을 쓰는 한국의 지역 공연장이 중국을 못간 해외 악단의 버팀목이 됐다.

1973년 유진 오먼디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방중 공연 리허설. [사진 중국국립교향악단]

1973년 유진 오먼디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방중 공연 리허설. [사진 중국국립교향악단]

중국이 코로나 팬데믹 이전처럼 서구 클래식 단체 수입에 돈을 쓰지 않으리란 징후가 곳곳에 보인다. 모객에 애를 먹는 1선급 이하 도시의 중국 공연장에서는 이제 서구 오케스트라 공연을 질적 성장의 결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웃 도시가 성장하는데 우리도 처지지 않겠다는 지역 정책 결정자들의 속 좁은 경쟁이 2000년대 후반 직할시, 부성급, 지급, 현급 도시에 클래식 공연장의 난립을 초래했다. 대형 공연장은 늘었지만 유료 관객이 비례해 늘지 않으니 유럽 악단 공연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당 지침을 따르는 공연장이 무늬만 사기업인 에이전시를 통해 해외 오케스트라 상품을 구입해 인민에 제공하는 구조다. 올림픽, 엑스포, 아시안게임 같은 이벤트가 있으면 모를까 평시에도 유럽과 미주 오케스트라가 필요한 건 아니다.

2010년대 후반 트럼프 정부 시절 미·중 갈등이 바이든 정부로 장기화되면서 정기적 중국 투어로 돈을 벌던 미국 오케스트라도 중국에서 자취를 감췄다. 2023년 11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유진 오먼디와 함께한 1973년 방중 공연 50년을 기념해 단원 십여 명을 베이징에 보냈지만 외교 의전 이벤트에 그쳤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예전처럼 음악외교로 미국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나, 중국 반응이 달라졌다. 필라델피아 악단 방중을 후원한 포드 재단에 대한 중국 정부의 냉랭한 태도 역시 낯선 풍경이다.

요즘 중국에선 해외 악단 수입 대신 자국 오케스트라를 육성하는 자강론이 퍼진다. 중국 심포니 발전 재단(China Symphony Development Foundation) 통계에 따르면 중국 프로 악단은 2015년 30개에서 이제는 80개가 넘을 만큼 폭발적 성장세를 보인다. 이는 성악을 전공한 시진핑 주석 부인 펑리위안 여사의 후광 덕분이다. 펑리위안 여사는 톈진에 문을 연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을 방문하고 방미 일정에는 현지 음악학교를 찾으면서 중국 클래식 인재 육성에 각별한 관심을 쏟는다. 중국 공연장이 신생 악단과 지역 시민의 입맛을 고려한 맞춤형 클래식 상품 개발에 힘쓰고 성악 부문에 집중하는 움직임도 펑리위안 여사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베이징서 실내악 한·중·일 3중주 공연

유롱

유롱

코로나 쇄국 이후, 전통 회귀를 추구하는 시진핑 정부의 문화 예술 정책 방향을 고려하면 피아니스트 랑랑, 유자 왕, 장하오천 등 저명 레이블 계약이나 경연 우승자의 해외 악단 중국 공연보다, 지휘자 유롱이 영향력을 미치는 중국 악단의 해외 진출에 힘이 실린다. 유롱은 상하이 심포니와 차이나 필하모닉 음악감독, 홍콩 필하모닉 수석 객원 지휘자, 광저우 심포니 명예감독, 베이징 음악 축제 의장을 동시에 맡는 ‘중국의 게르기예프’이자 ‘중국 클래식의 아이콘’이다. 유롱과 함께 하는 중국 악단의 유럽 원정이 중국 클래식의 굴기로 여겨졌다. 유롱이 움직이면 중국 기업이 후원하고 매니지먼트 아스코나스홀트가 계약하고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이 앨범을 낸다. 우리에겐 정명훈-서울시향 투어로 기억되는 2014년 BBC 프롬스가 유롱-차이나 필하모닉의 유럽 데뷔였다. 이제 중국은 해외 악단의 중국 방문 사업 대신, 유롱 지휘 악단의 해외 진출에 집중한다.

한국과 중국의 상업 목적 클래식 교류는 중국이 성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발해 2017년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을 내린 이후 줄곧 막혔다.

지난해부터 변화가 보인다. 계기는 중국 정부의 경제활동재개(re-opening)였다. 중국이 제로코로나 정책을 풀자 서방 오케스트라가 다시 대륙에 들어왔고, 정명훈이 한·중 클래식 교류 재개의 물꼬를 텄다. 정명훈은 지난해 11월 중국국가대극원(NCPA) 오케스트라 지휘로 베이징 국가대극원을 방문했고, 올해 4월 같은 곳에 피아니스트로 등장해 중국 첼리스트 지안왕,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다케자와 교코와 실내악 3중주를 함께 했다. 5월말 서울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리기 한 달 전, 중국은 정명훈을 베이징으로 들였다. 베이징과 상하이 클래식 고정 관객층에 정명훈 국적에 대한 거부감은 미미하다. 정명훈을 중심에 두고 중국과 일본이 한국과 협력한다면, 그 시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한·중·일 정상회의 직후 밝힌 2025~26년 한·중·일 문화 교류의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중·일 협력을 클래식에서 일궈낼 가장 큰 그릇은 서울 예술의전당, 베이징 국가대극원, 도쿄 신국립극장을 키 스테이션으로 한 대형 오페라 공동제작이다. 한국은 정명훈 외에 오페라 작곡가 진은숙이 있고, 일본은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음악감독 오노 가즈시가 있다. 중국에는 유롱 외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주역 소프라노 잉황이 서울과 도쿄를 찾는 그림이 자연스럽다. 보안법 통과와 함께 중국에 완전 편입된 홍콩 필하모닉을 2017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로 확인했듯, 중국 국가대극원 오페라 극장과 NCPA 오케스트라 역량을 확인한다면 중국 클래식에 대한 국내 관객의 막연한 불신은 그래도 줄지 않을까. 서구 시장은 중국을 돈으로 바라보지만 우리는 클래식에서도 미래를 함께할 동반자다.

한정호 공연평론가·에투알클래식 대표. 런던 시티대 대학원 문화정책 매니지먼트 석사. 발레리나 박세은, 축구인 박지성 등 예술 체육계 명사의 에이전시와 문화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에투알클래식 대표를 맡고 있다. 월간 객석, 일본 오케스트라연맹에서 일했고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다양성위원회 민간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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