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지근한 몸국·접짝뼈국…제주 잔치음식 원형을 만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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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호 20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고군분투. 그를 보면 먼저 이 단어가 떠오른다. 그는 조사·연구자 겸 교수자이고 저술가다. 방송인이자 맛집 탐험가이며, 음식문화 원형에 충실한 제주 전통 향토음식점 주인 겸 주방장이다. 대를 잇는 가업이다. 어머니 김지순(88) 여사는 1970년대부터 사라지는 제주음식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정리했다. 이를 대학에서 가르치고, 1985년에는 제주 최초의 요리학원을 열면서 가업이 됐다. 업(業)이란 생계유지를 위해 종사하는 일이지만, 그의 가업은 생계보다 사명감이 우선인 과업이 됐다. 보람은 있되 노력만큼 보상이 따르지는 않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니 고군분투가 아닐 수 없다.

세 가지 국, 1970년대 이전 제주의 맛

몸국과 괴기반을 중심으로 제주도 전통 잔치의 손님상을 되살린 가문잔치 정식 상차림. [사진 이택희]

몸국과 괴기반을 중심으로 제주도 전통 잔치의 손님상을 되살린 가문잔치 정식 상차림. [사진 이택희]

그는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 양용진(59) 원장이다. 제주 전통 향토음식 체험관을 표방한 음식점 ‘낭푼밥상’을 부인 조수경씨(57)와 운영한다. 낭푼밥상은 낭푼(큰 그릇)에 푼 밥을 가운데 놓고 국은 앞앞이 차려 한 상에서 여럿이 먹는 제주 고유의 공동식(共同食) 상차림이다. 모자가 함께 ‘김지순요리제빵직업전문학원’을 운영하며 연구·교육에 전념하다가 음식점을 연 건 2016년 여름이다. 제주 잔치음식 기반의 전통 향토음식 코스를 개발해 애월에서 파인다이닝급 ‘김지순의 낭푼밥상’을 시작했다. 그해 9월 28일 시행된 김영란법의 그늘은 컸다.

2019년 여름, 제주 시내 연동으로 옮기면서 메뉴를 약간 대중화했지만 몇 달 후 코로나19가 닥쳤다. 결국 지난해 7월 4일 “급작스럽게 현재 위치에서 짐을 빼게 됐다”며 낭푼밥상 시즌2 종료를 고했다. 그리고 열 달 만인 지난달 4일 기쁜 소식을 전했다. “옛 방식 그대로의 제주 전통 향토음식 체험관으로서 낭푼밥상의 모습을 정립하게 됐다. 지인들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싶지만 쑥스러움에 손은 들지 못하고 말없이 눈길만 보내본다. 나 제주 밥집 다시 시작했다!!”

양용진 원장이 개발한 기름간장비빔메밀국수. [사진 이택희]

양용진 원장이 개발한 기름간장비빔메밀국수. [사진 이택희]

시즌3 정식영업을 5월 1일 개시했다기에 9일 찾아갔다. 폐원한 요리학원 자리로 음식점을 옮겼다. 충무공에게 남은 배 12척처럼 위기의 양 원장에게도 최후의 보루와 지켜갈 음식문화 유산이 있었다. 이곳 음식의 본령은 원형에 충실한 제주 잔치음식이다. 돼지 한 마리 모든 부위를 삶아낸 육수가 기본이다. 솥 4개를 걸어놓고 부위별 정육, 사골, 잡뼈, 내장까지 따로 삶은 육수들을 매일 끓여 적당한 진국 상태를 유지하면서 음식에 맞게 배합해 조리한다. 이런 조리과정에서 고깃국물 맛이 깊다는 뜻의 ‘베지근하다’라는 제주 특유의 맛 형용사가 유래했을 터이다. 양 원장은 “준비하면서 원하는 육수 농도와 맛을 찾았고, 몸국·고사리육개장·접짝뼈국은 1970년대 이전 제주의 맛이 이랬다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메뉴는 앞의 세 가지 국(단품)과 그 국 중심의 정식, 네 가지 국수가 있다. 정식에는 밥과 국에 괴기반, 초무침회, 잡채, 기본 찬 5가지를 차린다. 고기 접시라는 뜻의 괴기반은 제주 잔치음식의 상징이다. 얇고 넓게 저민 삶은 돼지고기 석 점에 수애(순대)와 물기를 많이 빼 단단한 둠비(두부)를 한 점씩 담고 초간장을 곁들인다. 고기를 얇게 써는 건 잔치 때 귀한 음식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고루 나누는 ‘기술’이었다.

제주에 많은 고사리와 돼지고기를 넣고 가닥이 풀어져 뒤엉키도록 끓인 제주육개장 [사진 이택희]》

제주에 많은 고사리와 돼지고기를 넣고 가닥이 풀어져 뒤엉키도록 끓인 제주육개장 [사진 이택희]》

가문잔치 정식의 중심인 몸국은 돼지 한 마리 육수에 제주에 흔했던 참몸(참모자반)과 메밀가루를 넣고 모자반이 부드러워지도록 끓인 국이다. 여러 사람이 먹어야 하니 양 불리기 쉬운 재료들을 이용했다. 몸도 요즘은 지나친 해안 개발로 사라져 종자를 배양해 양식할 만큼 귀해졌다. 추자도나 완도산 모자반을 쓰는 음식점도 많지만, 제주 바다와 물살이 달라 맛과 질감이 다르다.

제주육개장(고사리육개장)도 같은 국물에 돼지고기와 고사리, 메밀가루를 넣고 끓인다. 푹 익어 실처럼 풀어져 엉킨 고기와 고사리 가닥 올려 국물 한술 뜨니 구수한 고사리 향이 입과 코에 가득하다. 자연의 맛, 이게 제주음식의 본색이다.

제주의 향 가득한 기름간장비빔국수

‘낭푼밥상’ 오너셰프 양용진·조수경씨 부부가 고기국수와 괴기반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이택희]

‘낭푼밥상’ 오너셰프 양용진·조수경씨 부부가 고기국수와 괴기반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이택희]

접짝뼈국은 돼지 앞가슴 1~3번 갈비뼈를 넣고 메밀가루 풀어서 끓인다. 모양이 양쪽 대칭이라 접으면 짝 붙어 접짝뼈라 부른다. 재래돼지 한 마리에서 어른 손만 한 게 두 개 나오는 귀한 부위다. 이 국은 전통 혼례 때 시집온 신부에게 차려주는 첫 밥상에 올리던 음식이라 한다. 얼마나 오래 끓였는지 젓가락으로 건드려도 뼈가 살에서 쑥 빠진다.

국수는 제주음식인 고기국수와 양 원장이 개발한 채소기름과 맛간장으로 비빈 세 가지 국수가 있다. 고기국수는 육지 잔치국수를 응용해 1920년대에 제주식으로 정착한 음식이다. 돼지 모든 부위를 삶은 국물에 국수를 말았다. 요즘은 유명한 집들도 돼지 사골 국물만 쓴다. 낭푼밥상에서는 예전 육수로 한다.

비빔국수는 제주 재료와 음식문화가 농축된 두 가지 양념으로 향토색을 살린 기름·간장 비빔이다. 육지의 들기름막국수 유행에 영향을 받아, 어릴 적 외할머니가 참기름과 간장 넣고 비벼 주시던 국수를 응용해 창안했다. 맛간장에 메밀가루 풀어 달인 간장과 채유(菜油)에 매운 제주 토종고추(붕어초)를 넣어 라유(辣油) 맛까지 낸 기름으로 국수를 비빈다.

정식 상에 세 가지 국과 고기국수, 기름간장비빔국수를 시식했다. 베지근하다는 게 어떤 맛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솜씨와 노력으로 양 원장은 2022년 12월 제주 향토음식 명인 제1호인 어머니 김지순 여사의 단독 전수자로 지정됐다. 시즌3을 여는 그의 소망은 소박하지만 간절하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유명 맛집이 될 순 없겠지만, 오롯이 제주의 전통을 지키는 집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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